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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의 교통시스템(선진국 무엇이 다른가: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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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비스 개선하며 시설확충/일 철도역 자전거편의 제공/여객수송 전체의 35% 차지
우리나라 철도가 해방이후 단 한 구간도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철도망 확충이라는 면에서 한마디로 우리는 전혀 발전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미국을 제외한 모든 선진국의 경우 철도는 여전히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교통으로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미국이 「고속도로의 천국」이라면 「철도의 왕국」은 단연 일본이다.
고속철도를 67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며 교통수단중 철도가 차지하는 여객수송 비율이 전체의 35%로,미국(1%)은 물론 철도시스팀이 발달했다는 영국(6%)·독일(6%)·프랑스(9%) 등 유럽국가와 비교하더라도 5∼6배나 높다.
일본철도를 「대중교통의 총아」로 자리잡게 한 것은 특유의 서비스정신과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한 상술이다.
일본 가시와자키시의 역전 광장.
원전취재차 이곳에 도착한 취재진은 광장 한구석에 가지런히 세워진 6대의 자전거에 어울리지 않게 일본철도의 심벌인 「JR」 마크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전거로 시내를 돌아보려는 JR이용권 소지자들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JR이용권만 있으면 공짜로 빌려준다』는 관리인의 설명이었다.
유럽의 유레일 패스를 본떠 만든 JR이용권은 한달 또는 보름씩 고속철도인 신간선부터 벽촌에 들어가는 일반열차까지 JR의 모든 기차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이를테면 「자유이용권」인 셈.
철도망에 자전거까지 묶어 운영하는 서비스정신은 지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유럽기차는 비행기보다 쾌적/“모세혈관” 철도망 소도시까지 연결
그러나 일본 운수성 철도국 하라 가즈히코씨는 『지금과 같은 서비스정신이 1백20년 역사의 일본철도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87년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일본국영철도(JNR)로부터 민영화된 일본철도(JR)는 기존 관념에서 탈피해 직영삼점·여행업체 운영 등 관련사업에 과감히 투자하기 시작,모든 서비스를 질적으로 한차원 끌어올렸다.
도쿄∼삿포로간을 달리는 야간 특급열차 「북두성」엔 풀코스 프랑스요리·호화판 침대 등 당시론 상상하기 어려운 서비스가 제공됐다.
또 JR는 철도외에 관련사업에도 영역을 확대,낚싯밥인 갯지렁이 번식업부터 훈제 연어 판매,캡슐호텔 경영에까지 어디든 손을 뻗쳐 짭짤한 수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우리로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JR의 절묘한 상술이 단순히 철도서비스의 개선에 머무르지 않고 철도망의 신장,즉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기여한다는 점이다.
JR는 새로운 철도를 개설하면서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먼저 JR는 철도를 놓으려는 지역의 땅을 구입한 뒤 철로를 깔고 역·대형백화점을 지어 상권이 형성되도록 한다.
이후 역세권이 개발되면서 자연히 땅값이 오르게 되면 이 땅을 개인에게 팔아넘겨 초기의 투자액을 빼고 철도운영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민도,관도 아닌 소위 「제3섹터」라는 개념으로 공공의 이익과 기업의 이윤 추구를 절묘히 조화시켜 사회간접자본을 늘리는 방식이다.
이같은 여건아래 현재 일본에는 1백여개의 개인회사가 사철을 운영하고 있어 끊임없이 서비스를 개선하는 것은 물론 이윤타산만 맞는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노선을 개발할 준비가 돼 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핵심인 「이윤 추구」가 일본 철도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아직도 모든 철도가 국유화돼 있는 유럽에선 철도 개발에 대한 개념이 다른 차원으로 이해돼야 한다.
모든 유럽국가는 철도를 공공서비스로 이해,질좋은 서비스를 국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철도망 확충 및 서비스 개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유럽의 여러 주요 도시를 다녀본 사람이면 비행기보다 기차여행이 훨씬 쾌적함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어느 도시든 철도가 도시 심장부까지 들어와 있어 멀리 떨어진 공항에 일찍 나가 기다리거나 짐을 부치는 번거로움도 없을뿐더러 도심을 빠져나갈 때 겪어야 하는 정체도 피할 수 있어 웬만한 거리라면 기차가 비행기보다 빠르다.
게다가 런던·파리·프랑크푸프트·밀라노 등 유럽 주요도시를 잇는 「인터시티 라인」(Inter City Line)을 대동맥 삼아 모세혈관처럼 국토의 구석구석까지 뻗어간 각국의 국영철도망을 이용하면 아무리 작은 소도시라도 여행하는데 전혀 불편이 없다.
승차감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락해 승용차 이상이며 덜컹거리는 소음도 훨씬 적다.
이처럼 질적·양적으로 이미 발전된 유럽의 철도망이 웅대한 유럽통합에 따라 또 한차례 개화기를 맞고 있다.
91년 체결된 마스트리히트조약의 일환으로 철로의 폭과 시스팀 자체가 각양각색인 13개 회원국가의 철도망을 하나로 묶겠다는 「범유럽망 설치계획」(Trans­European Network)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경을 통과하는 새로운 철로를 놓기 위해 한창 공사중이며 각국의 모든 전압과 통제시스팀에서도 달릴 수 있는 특수 기관차가 개발중이다.
독일 지멘스사는 이미 「유러스프린터」(Euro Sprinter)라는 전동기관차 개발을 거의 완료했으며 다른 대기업도 유사한 기관차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의 철도교통 수준/고속도에 밀려 정책 “찬밥”… 사양산업화/인식전환 없인 간선망구실 회복 불능
우리나라의 철도는 도로·항공교통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뒤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현실은 그간의 우리 교통정책이 고속도로 위주로 추진된 나머지 철도가 찬밥신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로건설을 담당하는 건설부와 철도확충을 책임지는 교통부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항상 건설부가 일방적으로 승리해 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쨋든 이로 인해 주요 도시간 간선교통망인 고속도로와 철도망이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함에도 불구,고속도로 위주의 기형적인 것이 됐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우리나라는 철도의 여객수송비율이 인원수 기준으로 90년 4.4%에 불과,30%를 넘는 일본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며 6∼9%인 서구선진국과도 차이가 심하다. 화물운송수단으로서의 비중도 계속 감소,60년에는 전체 화물물동량의 91%에 달하던 것이 이제는 59%로 떨어졌다. 철도의 절대길이도 선진국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3천1백여㎞로 일본(2만여㎞)의 6분의 1,프랑스(3만4천여㎞)의 10분의 1,독일(2만7천여㎞)의 9분의 1 수준이다.
이밖에 철도현대화의 기준이 되는 철로의 전철화 비율도 우리나라는 16.8%에 머물러 평균 50% 이상인 유럽선진국에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가 있다. 또 기차의 성능면에서도 새마을호가 최고 1백50㎞의 속도를 낼수 있으나 유럽의 경우 고속전철이 아니더라도 보통 2백㎞로 달릴 수 있다.
이러한 여건으로 철도는 자동차와 항공기에 밀려 계속 사양산업으로 전락,당국의 인식전환이 없는한 간선교통망으로서의 철도가 제구실을 영영 못할거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국도 뒤늦게 철도교통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부선과 호남선에 고속전철을 건설,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겠다는 장기계획을 추진중이나 10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지 숙제로 남아있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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