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후보들의 목표가 너무 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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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갑까지 넘긴 광복절을 앞두고 생각해 보면 지금처럼 좋은 시기도 없다.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천대받던 시절도 아니고,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독재가 국민의 숨통을 조이는 국면도 아니다. 불경기지만 배고픈 때와는 다르다. 한민족의 궤적에서 보면 가장 잘살고 있는 시대다. 국민을 파편화하는 지역 정서와 좌우 갈등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걱정이지만, 괜찮은 선거를 치를 수 있는 여건은 조성돼 있다. 문제는 이번 대선을 바라보는 일반의 인식 문제다. 5년용 대통령 한 사람을 또 뽑는다는 판에 박힌 반복 인식 말이다.

 이번 대선은 좌우 대립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거대 경제권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개방화는 이제부터 과연 한국이 지구화 추세 속에서 중간국 상황을 타개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두국의 자리로 도약할 수 있는가 하는 난제를 제기하고 있다. 남의 나라를 억압으로 식민 지배하지 않고 자수성가한 평화국가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국내 문제도 자신을 가져야 할 때다. 20세기 한민족 에토스(ethos)는 억압받고 굴종하던 찌꺼기를 안고서 강자에 대해 감정의 폭탄을 던지는 왜소(矮小)와 억하심정의 기류였다. 아직도 소수의 지사(志士)적 외골수 주장에 대해 사회 전체가 집단적 감정 폭발이 무서워 쩔쩔매는 분위기는 이를 잘 반영한다. 이제는 합리성이 우리 사회의 기본 씨줄과 날줄이 돼야 한다. 합리적이지 않은 감정 촉발에는 일고의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적 안전망도 이제부터 제대로 깔아야 한다. 축적된 경제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좀 더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 더 이상 재원을 핑계 대서는 안 된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일관된 축 위에서 남북 교류의 폭을 넓이고, 남북 문제에서도 정치·사회적으로 자신감을 갖게 해야 한다. 한낱 선거용이 된다면 역사의 퇴보다.

 국제 여건이나 국내 역량으로 볼 때 지금보다 더 좋은 시기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번 선거 과정은 사회적으로 성숙하고 세계적 역무(役務)를 제대로 수행하는 글로벌 국가(global state)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사회통합과 세계국가의 비전이 공유돼야 한다.

 그런데 현재 나선 대선 예비 후보들의 비전과 공약들을 조사해 본 결과 몇 개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정치 선동적이며 표 모으기용 기술서임이 드러났다. 실망이다. 작금과 같이 치졸하게 전개되는 진흙탕 싸움에 더해, 내거는 비전마저 후발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앞으로 5년은 뻔하다. 뭔가 의미 있는 역사를 기대하는 국민의 낙심은 이 나라를 계속 괴롭게 만들 것이다.

 후보들이 눈을 좀 더 높게 뜨기를 촉구한다. 국민의 수준에 맞춰 더 높고 의미 있는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지구촌에 죽순처럼 뻗어나고 있는 분야별 국가 간 연계망(government networks)에 어떻게 진입할 것이며, 지구적 문제 해결 체제(global governance)에서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를 먼저 제시한 다음, 5년간의 주요한 국가적 과제들을 이번 대선의 쟁점으로 전환시키는 공간을 후보들은 만들어야 한다. 계곡의 결투에 혼을 빼앗겨선 안 된다. 지도자는 서사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선거는 기술적 수단을 따지는 퀴즈 대회가 아니어야 한다. 비전 공유 과정이어야 한다. 또 하나의 시시한 해가 떠오르는 것으로 지레 무시하지 말자. 그리고 후보자들이여, 대망을 품자(aim high)!

이달곤 서울대 교수·정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