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터넷 10년 ③] 온라인계 폐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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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
요즘은 '디지털'이라는 말을 빼고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폐인.매트릭스.메신저 등은 현대인의 의식과 생활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용어다. 국내에서 인터넷이 상용화된 지 10년을 맞아 인터넷 중앙일보는 최신 유행하는 디지털 키워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편집자]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左) '폐인'들이 부조리를 '방법'하면서 시장이 투명해졌다. '응징한다'는 의미로 '방법한다'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경고문(右). 사진 제공=디시인사이드(dcinside.com)

"최저가에 맞춰드릴 수는 없고, 1천원만 붙여주세요."
10일 오후 서울 용산의 한 컴퓨터 조립 전문점. 인지도가 낮은 메인보드를 찾자 업주가 컴퓨터 부품 가격비교 사이트인 '다나와(www.danawa.co.kr)'를 확인하고 한 말이다. 한때 바가지의 대명사로 '용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말까지 들었던 용산이 변하고 있다. 일부에서 바가지 상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컴퓨터 부품을 사며 두세배의 가격을 지불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의 인터넷에 모든 가격 정보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한 중고 메모리 전문점에서는 자신이 사들이는 가격까지 공개할 정도다. 이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폐인'이라고 불리는 맹렬 이용자들이 서 있다.

폐인의 탄생과 진화= '폐인'이란 말은 3년전 "한시라도 일을 떠나지 못하는 당신, 당신은 메인입니다"라는 한 이동통신사 광고를 디지털카메라 동호회 '디시인사이드(www.dcinside.com)' 회원이 "한시라도 디시를 떠나지 못하는 당신, 당신은 폐인입니다"라고 패러디하면서 생겼다. 당시에는 디시폐인과 함께 '나우폐인(나우누리 유머 게시판 이용자)', '독투폐인(온라인 패러디 신문 딴지일보 독자투고 게시판 이용자)'을 3대 폐인이라 불렀다. 최근에는 '다모 폐인(MBC 드라마 다모의 열성팬)', '지식폐인(네이버 지식인 검색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답변자들)' 등 분야가 넓어지는 추세다.

'아햏햏' 등 수많은 유행어를 낳은 디시인사이드에는 "불가에서 중생이 있듯이 폐인 세계에는 햏자가 있다. 햏자들은 열반에 다다름을 득햏이라 하는데, 이 득햏을 하기 위해 항시 수련을 하고 있다. 득햏 수련에는 3대 기본 수련과정이 있으니, 그것은 주침야활, 면식, 햏언수행이다(햏자복음 3장)"라는 글이 있다. 낮에 자고 밤에 주로 활동하며 밥 먹을 시간도 아까와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햏언수행은 속세의 말들을 버리고 아햏햏만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폐인'이란 말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만큼 한 분야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뜻이 강했다. 온라인 게임 '리니지'에 심취해 밤낮없이 게임만 하는 사람을 '리니지 폐인'이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디지털에 중독돼 일상에서 일탈한 이들은, 디지털시대의 신인류 중에서 가장 부정적인 유형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히려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원조 폐인'을 자처하는 디시인사이드의 골수 이용자들이 정말로 실생활에서 완전히 망가진 폐인은 아니다. 대부분 평범한 직장인이거나 학생들이다. 인터넷 활동에 몰두하느라 다른 일을 돌볼 겨를이 없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뿐이다.

부조리는 '방법'한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일반인이 컴퓨터.오디오.디지털카메라 등 전문적인 분야의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하이텔 등 PC통신의 각종 동호회를 중심으로 사용기와 가격 정보 등을 공유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각종 '폐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불친절하거나 바가지를 씌운 상점들이 '방법'을 당하면서 시장이 투명해졌다.

'방법'은 부산시 해운대구 한 아파트 주민인 할머니가 평상에 깔아놓은 방석이 사라지자 "가져다 놓지 않으면 방법한다"라고 써 붙인 경고문을 디카로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돌면서 퍼졌다. 원래 '손발이 오그라지도록 저주한다'는 의미였으나 항의글이나 이메일을 다량으로 발송해 해당 사이트를 다운시키는 한편 이같은 사실을 게시판 등을 통해 널리 알려 응징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같은 '네티즌의 힘'이 상품 구입에만 발휘되지는 않는다. 2002년 '최악의 아티스트' 선정에서 '3대 폐인 연합'은 한 연예인에 몰표를 행사해 7개 전 부문의 대상자로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자동으로 클릭해주는 프로그램 '방법 2002'를 두시간만에 개발, 배포해 하룻밤새에 수만표를 몰아주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드라마 '다모'를 통해 '폐인'들은 오프라인 대중문화와 결합했다. 18만여명의 회원수를 가진 '다모 카페'(cafe.daum.net/mbcdamo)는 아직도 수재의연금 돕기 모금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온.오프라인 활동을 펴고 있다.

최근에는 폐인의 영역이 정치에까지 미쳤다. 열린우리당이 홈페이지(www.eparty.or.kr)에 '햏자의 세상보기'라는 게시판을 개설하자 네티즌들은 정치인들 사진을 합성, 패러디한 이미지를 게시판에 띄워 현실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극적 소비자에서 적극적인 프로슈머로= 폐인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이들은 수많은 상품들을 분석.평가함으로서 생산.유통업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컨텐츠 부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디시 폐인들이 올려놓는 수많은 디지털 영상들은 다른 네티즌들을 즐겁게 해주는 또 하나의 놀거리 생산물인 셈이다. 네티즌들은 물론 이 생산물의 평가와 유통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한마디로 폐인들은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는 '프로슈머'(prosumer, producer와 consumer의 합성어)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도 마찬가지다. 최근 등장한 '대장금 폐인'들이 '한상궁 마마님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등 드라마나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의 열성 팬들은 이제 방송 내용은 물론 사활을 쥐락펴락하는 집단으로 자리잡았다. 적극적인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안티사이트'는 이 폐인문화의 또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잘못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을 '방법'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건전한 사이버 공동체 문화의 시작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더 크다고 평가한다. 민경배 경희대 사이버대학 교수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기존 시민운동이 갖고 있던 엄숙주의를 벗어나 재미있는 비판을 통해 대중성을 획득하고 있다"며 "학연.지연으로 얽혀있는 오프라인 모임과 비슷한 상황에서 출발했던 온라인이 이같은 폐인 문화를 통해 나이.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는 수평적인 사이버 공동체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창우.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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