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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느긋” 중기는 “비상”/실명제실시 첫날 자금담당자 명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대기업/올봄부터 대비 자금 사정 “여유”/비자금 관리에는 애먹을듯
국내 굴지의 그룹 주력회사인 A사 자금부장은 13일 아침을 회사에서 맞았다.
전날 오후 6시50분쯤 실명제 실시발표가 있다는 TV뉴스급보를 본뒤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는 밤늦게까지 고위 경영진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했다.
주거래 은행 및 단자회사 관계자들과 오랜 통화를 하고 자정 넘어서까지 TV 토론에 나온 전문가들의 의견도 꼼꼼니 챙겼다.
그런 『충격적인 실명제 실시로 자금회전율이 느려지고 곧 시행될 금리자유화까지 겹쳐 회사채를 비롯한 실세 금리 상승이 우려된다』로 시작해서 『지난 봄부터 이어진 자금시장의 호전으로 사채 등 단기 고금리 악성부채를 모두 정리한데다 여유자금도 확보해 두었고,설비투자부진으로 당분간 큰 자금이 필요한 곳도 없어 별다른 문제는 없다』고 끝나는 보고서 작성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 봄부터 그룹부설 경제연구소와 함께 실명제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해 놓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스스로 갖고 있던 1만∼1천만원까지든 10개 정도의 가명구좌를 정리하는게 번거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3일은 새벽부터 오전 내내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도 『당분간 어렵겠지만 회사의 생존까지 걸린 것 같지는 않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구매담당이사는 오히려 일시적인 자금경색에 따라 중소협력업체의 연쇄부도 가능성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을 했다.
회의 중간중간마다 그는 대학동창 등 연줄이 닿는대로 이곳저곳 전화를 걸었고 여러통의 전화를 받았다.
입사동기인 그룹기획조정실 재무부팀장은 『앞으로 내가 맡고있는 비자금과 위장분산해 놓았던 회장 개인주의식 관리만 골치 아프게 됐다』고 푸념을 했다.
반면 대학동창이자 다른 그룹 주식회사 B사의 자금부장은 아예 자리를 지키지도 않았다. 자금담당이사는 해외출장중이고 부장은 그룹회장의 특강을 듣기위해 하루종일 밖에 나가있어 대리 혼자 부서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자금걱정을 안해본 화사답게 실명제의 여파에 완전히 비켜서 있는 것이다. 점심은 단자회사 차장과 함께 하면서 재무부와 한은에서 당분간 통화량 공급을 늘린다니 큰 걱정은 없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후 2시 은행창구가 열리자 빌딩 1층에 세든 C은행에 내려갔다온 과장은 『사업자등록증을 제시해야 당좌수표를 자기앞수표로 끊어줘 조금 불편한것 외에는 달라진게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사장·전무 등 간부들의 잦은 호출에 넋이 나갔다.
그는 오후 내내 컴퓨터 단말기로 증시 폭락과 채권시장 상황을 수시로 확인하다가 오후 5시20분쯤 단자회사쪽에 나가있던 직원들의 『자금이 남아돌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평소보다 이르게 자금을 막았다. 자금을 담당한지 9년동안에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라던 금융실명제 첫날이 피부로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 것이다.
그는 전화로 협력업체들도 우려하던 부도사태없이 하루를 넘겼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한뒤 오후 8시쯤 회사문을 나섰다.<이철호기자>
◎중기/사채업자 실종 어음할인 “막막”/재고물품 덤핑판매 현금마련
12일 오전 8시 서울 영등포에서 각종 쇠파이프를 제조하는 D금속의 상무 이모씨(40)는 출근길 버스안에서 사람들이 온통 실명제 얘기만 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씨는 어제 모처럼 일찍 귀가,가족과 TV를 보던중 대통령의 실명제발표를 보았고 이어 지방에 출장간 사장으로부터 『이러다가 내일 혹시 못막는거 아니냐』는 전화를 받았었다.
지난달 어음과 현찰을 반반씩 주기로 하고 철강대리점에서 우선 들여온 철판원자재 대금 5천만원의 지급마감일이 공교롭게도 내일인데 실명제때문에 결제에 차질을 빚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어음이야 끊어주면 되고 문제는 현찰인데,마침 판매처에서 받아놓은 어음 3천만원짜리가 있으니 이를 사채시장에서 「와리」(할인)하려고 해요. 아무리 실명제라고 하지만 평소 2천7백만원은 너끈히 나가는 두달짜리 진성어음인데 현찰 2천5백만원정도 못 만들겠습니까.』
이씨는 일단 사장을 안심시키기는 했지만 하룻밤을 넘긴 이날 출근길 발걸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회사에 도착해 간단히 업무를 본뒤 평소 거래하는 강남지역의 어음중개상들에게 전화를 넣었으나 모두를 자리를 비우고 있다.
직감적으로 『어이쿠 일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신사동으로 직접 달려갔고 그중 한 사무실의 여직원을 닥달해 인근다방에 있던 중개상을 만났다.
『물건이 하나도 없어. 쩐(사채업자)들은 아예 코빼기도 안비치고…. 명동이나 여의도가봐도 마찬가지야.』
실명제로 사채업자 자신들이 큰일난 판국에 어음사줄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중개상의 한심하다는 표정을 뒤로하고 다방을 나온 이씨는 하늘이 캄캄해졌으나 어렵지만 가끔씩 어음할인을 해주던 회사근처의 마을금고에 생각이 미쳤다. 전화를 넣었으나 마을금고의 전무는 『신문도 안봐요,누구 잡을 일있소』라며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대리점에 전화로 결제기일 연장을 요청했지만 대답은 『앞으로 거래를 중단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는 거였고 2시쯤엔 주거래은행으로 발길을 돌렸다.
갖고있는 어음이 애당초 은행의 할인 대상은 아니었으나 지점장에게 매달려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지점장은 자리에 없고 다른 직원들도 신원확인에 따른 업무지연으로 고객들의 항의를 처리하기에도 바빠 말도 붙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현찰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재고물량을 무자료거래인 「삐처리」를 통해 파는것 뿐이었다.
점심도 거른채 회사로 돌아온 이씨는 2시간동안 곳곳에 전화를 걸어 3천5백만원어치의 재고물량을 2천5백만원에 판다고 했으나 결과를 실패였다.
모든걸 포기하고 찾아간 대리점에서 그는 어느새 출장을 취소하고 서울로 올라온 사장을 만났다.
마침내 대리점측도 구입가를 조금 더 올리는 조건을 달아 전액을 어음으로 받아줬다. 다행히 위기를 피했지만 이씨에게는 실명제의 첫날이 너무나 힘들었고 둘째날부터는 더욱 막막해질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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