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도 필요한 「신한국 무대」(송진혁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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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 정부 출범 5개월이 지나면서 초기의 신명과 가슴 부풀던 기대감도 어느정도 가라앉고 있다. 한동안 국민을 열광(?)케하던 사정도 2단계로 접어들면서 차차 인기가 떨어지고 있고,더이상 개방할 인왕산도 없거니와 하나회도 대충정리가 끝났다. 갈채가 쏟아질 사정대상이나 인기 메뉴가 5개월만에 벌써 거의 소진된게 아닌가 싶다.
대신 울산의 노사분규라든가 토초세파동,전교조문제 같은 울적한 일들이 관심의 전면에 떠오른다. 좀체 기를 못찾는 경제가 모두를 우울하게 하고 있고 잘해보자고 한 화환 안보내기운동 같은 것도 엉뚱하게 꽃재배 농민의 시위로 연결되고 있다. 뜻밖에 국내선 항공기 추락이란 전에 없던 대참사가 터지기도 한다.
○주연 혼자 우뚝한 무대
정치쪽도 신명나는 일이 없다. 국회를 열어도 국민의 큰 관심을 못끌고,여야간에 과거문제 조사를 하느니 마느니 하지만 이렇다 할 뉴스 대접을 못받는다. 최근엔 그까짓 보선일자 하나를 두고 좁쌀싸움을 벌여 빈축을 샀다. 쩨쩨하게 일방적 택일로 득을 보자는 여당이나 그걸 두고 「놈」자를 써가며 선거보이콧까지 들먹인 야당이나 국민의 짜증을 일으키기기는 막상막하다.
이처럼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왠지 시덥잖게 돌아고 뭐라고 할까,판이 안짜이고 「장」이 안서는 듯한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신」자 돌림의 각종 정책이 잇따라 나오지만 대개 겉돌거나 공허하게 들린다.
왜 그럴까. 5개월쯤 지나면 판도 짜이고 분야별로 안정감있는 시책 추진이 가시화될 법도 한데 왜 그렇지 못할까.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이런상황이 된데는 사람의 문제가 크다고 본다. 비유컨대 지금 무대에는 오직 김 대통령 혼자 밖에 없다. 신 한국 건설이라는 대드라마가 관객을 매료시키고 시종 박수를 받자면 주연배우 한사람의 명연기만으로는 될 수 없다. 대중의 사랑을 받고 맡은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는 많은 조연들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에는 인기높은 주연만이 우뚝할 뿐 조연들은 초라하거나 배역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전체 연기진의 호흡도 맞는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지난 5개월을 보면 개혁이고 사정이고 모든 일을 김 대통령이 거의 혼자 끌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산공개에서부터 슬롯머신수사,입시부정 학부모명단 공개까지 대통령이 직접 지휘하고 지시했다. 현대노사문제도 긴급조정권은 장관의 권한인데도 장관은 력부급이어서 대통령이 직접 「중대결심」을 표명하고 『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나서야 하는 판이다.
○「소세」끼리론 판 안짜여
이렇게 되고보니 대통령 홀로 우뚝하고 내각이나 당,또는 국회는 위축되고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주연의 맹활약만 있을뿐 조연들은 존재가 없는 것이다. 더러 「실세」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지만 며칠 반짝하다가 「몬조심」하기가 일쑤다. 당직자는 있어도 중진은 없고,경제팀은 있어도 구심력은 안보인다. 실세가 없거나 있어도 눈에 안띄는 깊숙한 곳에 있음이 분명하다. 여북하면 YS가 다음엔 DJ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소문이 신문에까지 났을까.
이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내각 활성화니 국무총리 역할론이니 하는 여러가지 시도가 나오고 있지만 과연 「실세」아닌 「실세」라면 힘이 실릴 리가 없고 「실세」나 「소세」끼리 애써봐야 판도 안 짜이고 장도 서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국회나 내각·당의 일이 대개 꾀죄죄하게 보이고 제대로 국민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까닭이 다 여기에 있다. 이래가지고야 국가 운영이 잘될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우뚝 높이 솟은 최고지도자는 있는데 그 밑에서 판을 짜고 일을 추진할 차급,차차급 지도자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복잡한 세상에 대통령이 만기친재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크든 작든 일만 생기면 국민이 모두 대통령만 쳐다보게되는 체제는 대통령 자신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박 정권 때엔 이른바 실력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부패·권력투쟁 등 허다한 문제를 일으켰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영역에서 구심력을 발휘하고 대통령의 방파제 노릇을 한것도 사실이다.
그때엔 경제에 있어서도 장기영·김학열·남덕우·김정염씨 등 잘하든 못하든 대통령 밑에서 책임지고 끌고 나가는 중심 인물들이 있었다.
박 정권 때의 방식을 이제와 그리워해서가 아니라 어떤 정부라도 분야별로 일을 틀어잡고 소신과 능력을 발휘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인물들과 그런 운영방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급­차차급 형성돼야
이제라도 정부·국회·당을 활성화하고 국정의 분야별로 활기있는 시책추진을 하자면 결국 사람의 틀을 다시 짜야 할 것이다. 배역을 소화해낼 수 없는 사람의 교체는 빠를수록 좋다. 잦은 교체가 바람직하진 않지만 부적격자를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계파나 친소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능력위주의 과감한 기용이 필요하다. 특히 전문적 능력과 식견이 요구 되는 경제분야에는 전정권과의 인연이 있더라도 일을 해낼수 있는 사람을 얹혀야 한다. 일단 요직을 맡긴 이상 권한과 책임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분야에서 구심력을 발휘하고 판을 짤수 있게 된다. 대통령만 우뚝하고 나머지는 직책이 뭐든 도토리 키재기가 되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 국정의 각 분야를 틀어잡고 일할 차급,차차급 지도자의 형성이 시급하다.<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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