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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진압 안한 게『직무유기』냐"|80년 전남도경 국장 안병하씨 미망인 전임순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5·18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판명된 이상 남편에게 씌어진 직무유기누명도 벗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80년 5·18 광주 민주항쟁 당시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등 직무를 유기 했다는 이유로 계엄사에 연행돼「조사」를 받은 뒤 퇴직 당한 안병하 전 전남도경 국장(88년 사망·당시 60세)의 미망인 전임순씨(61·서울 은평구 진관외동404).
안 국장이 계엄사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고 최근 광주시에 5·18피해자 보상 신청을 낸 전씨는 19일『돈 때문이란 말을 들을까 봐 몇 번이고 망설인 끝에 용기를 냈다』며 13년 동안 쌓여 온 악몽의 나날을 털어놓았다.
80년 5월17일 자정쯤 계엄선포 소식을 듣자 관사를 뛰쳐나가는 남편을 보고 전씨는 걱정이 되면서도 계엄군이 들어오면 경찰이 편해지겠다 싶어 은근히 반겼다고 한다.
그러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시민들을 자극, 학생시위를 80만 시민궐기로 치닫게 했다.
19일 오후 서울 방배동 집에 올라온 전씨는 곧 광주외곽이 차단되고 21일 방배동 집과 광주 관사를 잇는 전화도 끊기는 바람에 남편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26일 점심때쯤 그분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공항이라면서 서울로 온다 고요.』
그러나 안 국장은 계엄사로 연행되는 길이었다. 안 국장은 계엄사의 강경 진압 요구를 거부한 채 시민과의 극한 충돌을 막기 위해 예 하 경찰에 무기를 수거, 안전지대로 숨겨 놓게 하고 다친 학생들을 성심껏 치료해 주도록 독려했었다.
그래서 경찰이 철수한 21일의 도청 앞 발포사건이전까지 시위대와 경찰은 단 한 건의 유혈충돌도 없었다.
계엄사에 연행되던 26일 오전에는「시민 군」으로부터 경찰이 들어오면 도청 등을 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을 정도였다.
안 국장이 방배동 집에 온 것은 6월13일. 계엄사에서 11일간, 치안본부에서 1주일간을 갇혀 있다 풀려난 것이었다.
퀭한 모습으로 들어선 안 국장은 안방 벽에 걸린 정복·모자를 가리키며『꼴도 보기 싫으니 없애 버 리라』면서 풀석 주저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고문장면을 연상하며 몸서리쳤던 전씨의 가슴도 덜컹 내려앉았다.
육사를 졸업(8기)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뒤 62년 총경으로 경찰에 투신한 안 국장은 강원·경기도경 국장 등을 거처 79년2월 전남도경 국장에 부임하는 동안 가벼운 징계한번 안방은 성실·청렴한 모범경찰로 녹조훈장을 비롯, 수 차례 훈·표창을 받아 치안감 승진 1순위 후보로 꼽치고 있었다.
『사표 쓸 때 부속 주임에게「그렇게 당하고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고 하더랍니다.』
건강하기만 하던 안 국장이「그렇게 당한」수난은 얼마 안가 병으로 나타났다. 담낭염·신장염에다 심부전증까지 겹쳐 1주일에 세 번씩 피를 걸러 주는 고통이 계속됐다. 퇴직금 3천여 만원을 몽땅 쏟아 붓고도 모자라 88년5월에는 60년대 말 마련한 방배동 집을 처분했다. 그나마 병치레 빚 등(1억2천만원)을 갚고 나니 남은 돈은 4천만원뿐이었다. 2천만원 짜리 전세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안 국장이 재직 중 틈틈이 모은 수석들을 둘 곳이 없어 새 주인에게 선물로 줬다.
그러나 안 국장은 넉 달여 만인 88년 10월10일 숨졌다. 어떻게 당했는지 끝내 입을 열지 않던 그가 88청문회에 대비, 광주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쓰기 시작한 회고록은 불과 몇 장도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전씨와 세 아들은 전세 아파트마저 내놓아야 했다.
동생이 마련해 준 전세방에서 친정 어머니(85)를 모시고 살면서 그때의 충격으로 얻은 우울증과 고혈압에 시달리는 전씨가『직무유기 했다고 남편을 잡아간「그들」이 고문까지 하면서 찾아낸 게 뭐 있습니까』라며 내민 안 국장의 경력증명서(6월11일 발급)에는 포상 란 만 가득 메워져 있을 뿐 징계·직위 해제 란은「이하여백」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퇴직 사유도 고작 의원 면직이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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