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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의 사회간접자본 투자/최철주(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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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럽공동체(EC)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때때로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느라 애를 먹는다. 우리가 낙도에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외로움도 든다. 올해 출범한 이 단일시장의 복판에 서게되면 우리가 언제까지 우물안에 갇혀 개방체제 논의만 되풀이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답답한 심정이 되고,나라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개혁의 리듬이나 박자가 밖의 변화와 전혀 조화되지 못한채 소리만 요란한 듯해 더욱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본유치에 국경 없어
EC 국가에서 받는 충격은 명실상부한 「투자환경」 정책이다. 어느나라 기업이건 투자만 해준다면 상품 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땅도 내주고 돈도 빌려주며 거기다 일정한도의 세금까지 면제해주겠다는 것이다. 시장전망이 좋을 경우 누구나 혹해 달려들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의 홍보활동도 대단하다. 프랑스나 독일의 고속도로변까지 외국기업의 투자에 대해 상당한 세제혜택을 주는 것을 알리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안내간판이나 앞을 다투듯 곳곳에 꽂혀 있다. 세상은 이처럼 달라졌다. 자본이나 서비스시장의 이동을 가로막았던 국경도 사라졌고,차별도 없어졌다.
EC 국가들은 석유파동 이후 경험하지 못했던 경기침체가 골치아픈 현안이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한 자유화와 새로운 기회에 대한 도전에 운명을 걸고 있다. 이같은 노력은 미국이나 일본에 대항하는 경제전쟁으로 나타났으며 냉전체제 붕괴 이후 지역국가들의 공생 전략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EC의 지도를 바꾸는 대규모 사업들이 이 지역 국가들의 경쟁력 향상에 실로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
EC 경제권을 요새화할 수 있는 결정적 프로젝트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확대다. 영불해협을 연결하는 해저터널 완공이 가까워졌고 프랑스와 독일의 신고속도로사업,고속전철 운행의 확대계획에 이어 네덜란드도 같은 사업을 벌이고 있다. 독일은 세계 최대의 화물 항공기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시설을 넓히기 위해 앞으로 7년동안 무려 74억마르크(3조7천억원)를 쏟아부을 예정이다. EC국가들이 재정에 여유가 있어서 이같은 사업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사회 간접시설에 대한 투자가 산업경쟁력을 높이는 가장 빠른 길이며 우수제품을 보다 싼 값으로 보다 빠르게 시장에 공급하도록 하는 최선의 방안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부가가치산업 주력
공공적 지출에 의한 공간정비는 1차대전과 2차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의 종합개발 사업의 핵심이었다. 고속도로와 철도·공항·항만·원자력발전소 건설 등을 통해 산업입지를 촉진하고 지역개발을 도왔다. 통일이 가져온 경제적 곤경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고속도로(아우토반)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은 나치정권의 히틀러가 유일하게 남긴 좋은 교훈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바젤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 구상이 열매를 맺어 그가 죽기 직전인 44년까지 10년동안 현재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2.5배에 이르는 4천㎞의 아우토반을 독일 전역에 만들었다. 국방 이외에 일면 국토정비 정책이 자동차 등에서 독일산업의 우위를 가져왔다. 지금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50초마다 한대,하루 8백대의 항공기가 이·착륙하고 승객이 갈아타는 시간을 4∼5분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로테르담 항구(네덜란드)는 3백여개의 유럽도시와 연결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럽의 관문이다. 「우리 항구는 자유항보다 더 자유롭다」가 이 도시의 캐치프레이즈다. 외국의 보세 보관 물품에 관세도 세금도 물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작년에 이 항구에서 무려 1천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우리나라 한해 수출액을 훨씬 넘어서는 거금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는 로테르담항 재개발 1백년 계획을 세우고 추가 공사를 벌이고 있다.
영국 런던 중심지에서 10여㎞ 떨어진 테임즈강 주변의 도크랜드 개발(투자규모 12조5천억원)은 국가적 복합경영의 대표적 사업이다. 서울 여의도의 여덟배나 되는 강연안 지역에 지하철 및 경전철역이 설치된 고층건물들이 세워졌다. 수많은 건물의 사무실에 근무하는 샐러리맨들은 같은 장소에 있는 우체국·병원·경찰서·체육시설을 단 몇 분 사이에 이용할 수 있으며 부근 주택에 입주해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다. 17분 거리에 있는 공항,시내 중심지까지 곧장 달릴 수 있는 4차선 도로와 해상버스도 운행되고 있다. 시설의 복합화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효과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유럽의 「경제의 국제화」는 막힌 곳을 뚫고 좁은 곳을 넓히며 산업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가는데 특징이 있다. 그것이 고부가가치 산업을 일으키는 기초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시급한 도로·항만확충
우리에게도 투자확대를 유도하는 과감한 규제완화와 사회간접시설을 넓히는 확고한 비전이 필요하다. 정부는 돈타령과 무소신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사회간접시설 관련요금의 현실화와 외부차입 및 민자유치 확대,개발이익 등의 환수조치 이외에 또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가. 높은 물류비용과 여전히 복잡한 행정절차 등으로 기업의 부담은 줄지 않고 있다. 샐러리맨들은 낮은 의료서비스와 턱없이 높은 사교육비,교통혼잡에 따른 시간·에너지 손실이 마냥 오른 임금을 까먹기 일쑤다. 그래서 EC 몇나라보다 우리들의 임금수준이 높아도 생산성 향상은 더디고 기업의 경쟁력은 제자리 걸음이다. 어디서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가는 분명하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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