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의 사정개혁 목소리(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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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 민사지법 단독판사 28명이 낸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은 사법부 개혁의 출발점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법부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를 감안해 두차례나 전국 법원장 회의를 열어 사법부의 개혁방향을 논의하고 몇가지 제도개선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국민의 공감을 사기에는 미흡한 것이었다. 개선안 자체가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제한,전관예우 금지 등 지엽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개혁의 핵심이라 할 과거에 대하 자기반성에 너무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지난 5월에 이어 소장판사들이 이번에 다시 개혁에 관한 의견서를 내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개혁의 구체적인 방안들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사법부가 과거를 겸허히 반성해야 하며,개혁은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 자체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면 그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장판사들은 지난 시절의 사법부가 「정치권력 앞에 무력」했으며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대에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은 고사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지적했다. 사법부가 이러한 반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소장판사들의 지적은 대다수 국민들이 지난 시대의 사법부를 보는 시각과 일치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소장판사들의 지적이 그동안 있었던 법원장 회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고,더구나 소장판사들의 일련의 움직임을 불쾌히 여기는 시선마저 사법부내에 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물론 과거의 사법부가 현실의 정치권력 앞에 무력함을 보여주었다 해서 지난 시대의 사법부 기능을 전적으로 부정해 버리거나 노장은 보수 내지 반민주,소장은 개혁 내지 민주라는 식의 2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사법부를 보는 것은 옳지않은 일이다. 소장판사들 간에도 개혁의견서 작성에 반대의견이 있었던 점으로 알 수 있듯 시대나 세대로 개혁과 보수,민주와 반민주를 가르는 공식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사법부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의 양심과 품위를 지키려 노력해온 법관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해서도 안될 것이다. 단지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거의 사법부에 깊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 분명히 있었고,그런만큼 그에 대해선 사법부 전체가 직급이나 세대를 초월해 공통의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장판사들의 의견을 사법부 상층부가 겸허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사법부 개혁의 밑바탕으로 삼았으면 한다. 행여나 이번 일이 상하간·세대간의 갈등으로 번져 제3의 사법파동으로 확대된다면 그것은 사법부는 물론 사회 전체에도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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