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늘어나는 특수 직|경영 외 임원 많다|천만그루 나무보모|술맛 감별하는 공장장|파일럿 건강체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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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하루 수백 여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김포공항. 24시간 불을 켜고 근무하는 곳은 관제탑만이 아니다. 남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기장 등 비행기 승무원과 승객의 건강을 돌보는 의료 팀이 불의의 사고에 대비,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이 의료 팀의 팀장은 이용호 대한항공 항공보건의료원장(41). 이 원장의 대한항공 내 직위는 이사다. 의사인 이 원장이 항공사의 이사가 된 것은 이원장의 독특한 역할 때문이다.
이 원장은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항공우주의학을 전공했고 연세의료원에서 예방의학을 담당하다 지난 87년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입사당시의 직위가 벌써 부장이었고 38세 때인 90년 이사로「고속승진」했다.
이 원장은 의사 4명과 간호사 20명 등 40여 명의 의료진을 데리고 대한항공소속 기장 1천여 명 등 1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임직원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고공에서 장시간 근무하는 승무원의 경우 기압변화에 따른 여러 가지 질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웬만한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진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또한 승무원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승객의 안전은 물론 한 대 당 1천억 원이 넘는 재산(비행기)을 보호하는 것이어서 기장들은 1년에 두 번씩 이 원장으로부터 정밀건강진단을 받아야 비행기를 탈수 있도록 돼 있다.
용인자연농원의 나무를 돌보는 일을 맡고 있는 성성기 씨(49)의 직위도 이사다. 중앙개발 이사인 그는 천안농고를 졸업한 뒤 말단인 일반 사원으로 입사해 40대 초반인 86년 이사로 승진했고 올해부터는 중앙개발의 자회사인 한우리 조경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
성 이사는 한우리 조경의 1백 80명 임직원과 1천만 그루에 이르는 나무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안양 컨트리클럽의 뛰어난 조경과 잔디관리도 그의 솜씨다.
이 원장과 성 이사는 각각 자기분야를 가진 전문직업인으로 기업에서 성공한 경우다. 이처럼 최근 기업의 업무영역이 다양해지고 세분화되면서 기획이나 영업·자금 등 일반 경영업무가 아닌 특이한 분야를 맡는 임원들이 늘고 있다.

<중소기업만 전담>
언뜻「겸업」이나 이색적으로 보이는 세분화된 업무가 영업·생산 등의「본업」이상으로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우그룹의 경우 새 정부 출범이후 중소기업과의 원만한 관계가 강조되자 정책적으로 계열사인 (주)대우에 중소기업 지원부를 만들고 이재홍 이사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이사는 대우와 거래하고 있는 1천여 개의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담보능력이 없는 중소기업에 단기운영자금을 빌려주거나 자금·경영관리·정보·전산화·해외진출을 돕는 게 그의 일이다.
중소기업 부는 최근 파키스탄에 공단을 조성, 중소기업을 입주시키기로 하고 이곳에 입주할 30여 중소업체 사람들의 현지시찰을 주선하기도 했다.
대 정부 로비를 맡는 대기업의 임원들도 본업과는 비켜 있지만 해당기업에서의 역할이 본업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정부정책의 흐름을 읽고 이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경쟁기업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기려면 자기기업의 입장을 정부관리들에게 인식시키고 이들과 돈독한「관계」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로비이스트 임원들의 역할은 새 정부 들어 과거보다 위축되고 있다.
과천 경제부처를 10여 년간 담당해 온 S 그룹의 김 모 상무는 요즘 새 정부의 개혁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후 내 집같이(?) 정이 들었던 청사건물이 낯설어졌다고 말한다.

<"시간 없다" 거절>
사무관 때부터 자주 얼굴을 맞대던 과장·국장급 공무원들을 대하기가 옛날보다 서먹서먹하고 밥 한끼 같이 먹는데도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김 상무는 최근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공무원에게『저녁에 만나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얘기를 꺼냈다가『시간이 없다』고 거절당했고『앞으로 청사에 들어오지 말고 할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대 정부 로비를 맡는 임원들은 상대하는 관료의 직급에 따라 이사에서부터 사장 급까지 다양하며 과천 청사에만 수십 명이 정기적으로 드나들고 있다.
기업의 이미지 홍보에 한몫을 하는 스포츠 단의 운동선수 출신도 임원으로 대거 진출하고 있다.
코오롱의 마라톤 팀 감독인 정봉수씨(58)는 육상계에서는 처음으로 지난해 8월 이사로 승진했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 역시 평생 명예이사다.
삼성그룹에는 남자농구 총 감독인 이인표 이사(삼성전자)등 5명의 선수출신 이사가 재직 중이다. 씨름선수 출신 이준희 일양약품 코치도 86년부터 이사대우를 받고 있다.
술과 음식을 만드는 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술을 칵테일 하는 블렌더나 주방장이 임원으로 승진하는 추세다.
진로 위스키의 이천공장 공장장을 맡고 있는 김철환 상무(54)는 주량이 소주 반병이지만 술맛을 감정하는데 뛰어난 코와 혀를 갖고 있어 공장장의 직위에 올랐다.

<코·혀에 1억 보험>
그는 지난 65년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뒤 진로의 전신인 서광주조에 들어가 입사 18년 만인 83년 이사가된 뒤 이어 87년 상무로 승진했으며 30여종의 술을 개발했다. 코와 혀 등에 상처를 입어 술맛을 감정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1억 원을 보상받을 수 있는 보험도 들어놓았다.
이밖에도 신라·롯데 등 큰 호텔의 주방장이 임원으로 승진하는데 서도 나타나듯 사회가 다양해지고 이에 대응하는 기업의 업무가 세분화될수록「본업」이 아닌 특이한 분야에서 전문직업인이 임원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길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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