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의 뿌리를 파헤쳐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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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갑갑증을 낳던 검찰의 슬롯머신 수사가 급진전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마침내 검찰은 6공의 실력자였던 박철언의원과 안기부의 고위직을 지낸 엄삼탁병무청장이 슬롯머신계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정덕진씨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잡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섰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박 의원은 6공의 실세중 한 사람이었고,엄 청장은 6공시절 안기부장 특보와 안기부 기조실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수뢰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런 인물들이 전국의 폭력조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덕진씨와 깊숙한 교분을 가져왔다는 사실만으로도 5,6공의 권력층과 폭력조직이 정치공작적으로 밀접히 연계되어 있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낳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보면 검찰의 수사가 박 의원과 엄 청장선에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박 의원과 엄 청장의 관련이 5,6공 권력층과 슬롯머신업계 및 폭력조직과의 밀접한 연계를 시사하는 것이라면 배후관련자도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 항간에는 정씨가 궁지에 몰리자 광범한 비호세력을 감추기 위해 수사당국이 만족할 만한 비중의 두사람만 골라 관련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또한 박 의원은 특정인에 대한 정치보복적 수사가 아니냐는 의혹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의혹을 씻기 위해서도 검찰의 수사는 더 엄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상식적인 눈으로 볼때도 슬롯머신 및 조직폭력의 배후가 특정인 두세명에 국한될리가 없다. 정치인·검찰·경찰·안기부·세무서·구청 등 관련기관의 고위직에서부터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연관이 되어있다고 봐야 한다. 지난 16일 자살한 광주지검 사건과장 최인주씨의 경우가 좋은 본보기다. 최씨는 고위 공직자는 아니었지만 역시 슬롯머신업계 및 조직폭력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검찰의 이번 수사가 단순히 슬롯머신업계의 비리를 파헤치는데 그치지 않고 조직폭력의 온상을 깡그리 뒤엎는데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습기찬 음지에서만 독버섯이 자랄 수 있듯이 조직폭력도 그를 유지시켜주는 온상이 있기 때문에 활개를 치는 것이다.
그 온상이란 바로 슬롯머신·유흥업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 업종에는 각종 불법과 탈법에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을 눈감아주거나 뒷받침해줄 비호세력이 고위직에서부터 말단 실무직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필요하게 된다. 이런 필요성과 자금의 수요가 맞물려 권력층과 조직폭력의 연계가 생겨나고 그런 틀속에서 말단 공무원들의 비리도 파생되는 것이다. 우리는 검찰의 수사가 그같은 해묵은 구조적 비리의 뿌리를 캘 때까지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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