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원 조선기술' 중국에 넘어갈 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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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올 1월 국내 한 조선업체에서 기술 유출이 시도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대형 조선업체 D사의 기술기획팀장이던 엄모(53)씨가 지난해 퇴사하면서 개인 컴퓨터의 파일을 삭제하고 나갔는데 그 컴퓨터에 중요한 자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를 단서로 엄씨의 행적을 은밀히 추적하기 시작했다.

추적 결과 엄씨는 지난해 1~2월 회사 서버에 접속해 공정도.설계완료 보고서.선박 완성도를 이동용 하드디스크에 옮겨 담았다. 여기에는 원유 운반선, 액화천연가스(LNG)선, 자동차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69척의 완성도가 포함됐다. 모두 36만여 건(183기가 분량)에 이른다. 기술관리 총책임자였던 엄씨는 중요 정보가 담긴 서버에 마음대로 접속할 권한을 갖고 있어 손쉽게 기술을 유출할 수 있었다.

같은 해 3월 퇴사한 엄씨는 그해 12월 선박 설계 전문업체인 마스텍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스텍사는 올 초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와 손잡고 합작회사를 차렸다. 이 합작사는 내년 말을 목표로 칭다오에 165만㎡ 규모의 QJMS조선소를 건설하고 있다. 마스텍은 중국에서 QMME라는 설계 전문 자회사를 차렸다.

6개월간 엄씨를 감시하던 국정원은 7월 말 엄씨가 QMME 책임자로 중국에 갈 예정이라는 정보를 확보, 검찰과 협조해 지난달 10일 엄씨를 체포했다. 서울 남부지검 형사5부는 국내 조선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려 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엄씨를 구속 기소했다고 31일 밝혔다. 중국으로 유출될 경우 한국 조선업계는 35조원의 피해를 볼 수 있는 기술이었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수사 결과 엄씨가 가지고 나간 일부 정보는 이미 QJMS가 러시아 선주로부터 수주한 벌크선을 설계하는 데 참고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 7월 9일자 1면>

◆왜 조선기술을 노렸나=지금까지 국내 기술 유출은 주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휴대전화와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산업에서 발생됐다.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 조선산업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국정원의 설명이다.

엄씨가 빼돌린 기술과 설계도면은 원래 개발 비용만 5000억원이 넘는다. 조선업계는 만약 이 기술들이 모두 중국으로 넘어갔다면 중국 업체는 이를 이용해 앞으로 5년간 최소 35조원 규모의 수주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중국과 경쟁하는 국내 조선업체 입장에선 그만큼의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또 국내 조선업체와의 중국 업체의 기술 격차도 2~3년 앞당겨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조선산업에서 일본을 제치고 수주량 세계 2위에 오르며 1위인 한국을 추격 중이지만 아직 격차가 큰 상태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 분석에 따르면 한국과 중국의 조선 기술 수준은 한국이 75.2(최고 기술 보유국=100점), 중국이 54.3으로 한국이 한참 앞선다. 이 때문에 중국은 한국의 기술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부산에선 국내 조선사 퇴직자를 스카우트하려고 중국 조선소가 차려 놓은 위장 설계 전문업체까지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과 국정원이 산업 스파이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지만, 회사도 중요 기술에 대한 보안에 신경을 쓰고 퇴직자를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철재.송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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