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양재역 인근이다.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1624년)을 피해 황급히 한양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향하다 허기에 지치자 신하들이 쑤어 준 죽으로 말 위에서 배를 채웠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그러고는 잠잠하던 이 곳은 3백여년이 흐른 뒤 돈에 굶주린 졸부들이 '말에서 채 내릴 틈도 없을 만큼' 다급하고도 게걸스럽게 땅을 먹어치우는 곳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후반,논밭만 가득하던 이 곳은 개발 붐을 타고 불로소득을 꿈꾸는 투기꾼들로 북적댔다.'말죽거리 잔혹사'는 이 무렵인 78년, 강북에서 강남으로 전학온 한 고등학생이 겪은 슬프고도 참혹한 이야기다. 영화는 이소룡(李小龍.리샤오룽)으로 열리고 성룡(成龍.청룽)으로 닫힌다. '정무문'으로 시작하고 '취권'으로 엔딩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30~40대의 기억에 더 호소하는 영화다. 영화의 태반을 차지하는 당시 학교 생활의 다채로운 삽화들은 이 연령대 관객을 아련하고도 찡한 과거로 데려간다. 교문을 들어설 땐 '충성'이라 외치며 경례를 붙이고, 가뜩이나 빡빡머리인데도 조금만 길어도 바리캉으로 밀어대고 엎드려뻗쳐 놓고 야구 배트로 내리치는 등 군대 뺨치는 규율, 그런 중에도 '빨간 책'이라 불린 도색잡지를 돌려보고 라디오 심야방송에 엽서를 보내며 가발을 쓴 채 고고장에서 막춤을 추는 식으로 갇힌 욕망을 해소한다. 여기에 '원 서머 나이트'나 '필링''젊은 연인들' 같은 당시 히트한 팝송과 가요가 틈틈이 깔리면서 향수를 간지럽힌다. 이 밖에도 영화에서 되살려낸 70년대 학교 풍경의 목록은 아주 길게 늘어뜨릴 수 있다. 이를테면 추억상품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영화는 액션과 로맨스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태권도 도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모범생으로 자라온 현수(권상우) 는 훤칠한 외모에 싸움잘하는 우식(이정진)과 배짱이 맞아 친구가 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올리비아 핫세로 불리는 여고생 은주(한가인.사진(下))가 끼어들면서 틈이 벌어진다.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라는 달콤한 한 마디로 은주의 마음을 뺏은 우식에게 순진한 현수는 "내가 아주 어렵게 이루려 했던 걸 녀석은 너무 쉽게 얻는다"며 상처를 입는다. 은주조차 "나는 네가 내 친구들보다 더 편해"라며 연정이 아니라 우정임을 애써 강조한다. 영화의 절정은 현수가 부조리하고 가혹한 학교 생활을 더 견디지 못하고 이소룡의 쌍절곤을 익힌 다음 학생들 사이의 최고 권력인 선도부장과의 대결에서 이긴 뒤 "대한민국 학교 엿먹으라고 그래"라고 외치는 부분이다. 찌릿한 카타르시스가 객석으로 몰려 온다. 하지만 이미 '친구'라는 영화를 갖고 있는 우리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그다지 새롭지가 않다. 줄줄이 이어지는 에피소드의 나열은 '친구'보다 더 세밀하게 지난 시대를 묘사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하나로 꿰어내는 주제 의식은 많이 약하다. '친구'가 악질 교사와 불량 학생의 모습 등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우정과 배신이라는 문제로 나아가면서 굵직한 목소리를 낸다면 '말죽거리'는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하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이소룡이 쓴 '절권도의 길' 한 구절을 인용한다. '진정한 무도인은 한번 길이 정해지면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정진할 뿐이다'-. 정작 유하 감독은 이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말죽거리 잔혹사'는 배우들의 연기가 하나같이 살아 있고 시대 묘사가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볼 만한 영화로 남는다. 특히 수 틀리면 급우의 머리를 볼펜으로 찍어버리는 찍새 역의 김인권, '빨간책'을 공급하며 용돈을 버는 햄버거 역의 박효준, 교사에겐 비굴하고 학생에겐 군림하는 선도부장 역의 이종혁 등 조연들의 공이 컸다. 15세이상 관람가. 16일 개봉.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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