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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탄 쏟아지는 이라크까지 禁女의 벽넘어 돌격 앞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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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08면

2007년 새해는 밝았지만 바그다드엔 아침이 오지 않은 듯했다. 1월 25일. 미국 대사관이 있는 그린 존(Green-Zone)에서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MNF-I)가 있는 캠프 빅토리로 향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타탕타탕’. 저항세력의 소화기 탄알들이 우리가 탄 라이너(코뿔소) 장갑차를 뚫지 못한 채 튕겨져 나갔다. “뒷문으로 하차. 양측 풀숲에서 장전한 채 기다려라. 적이 쏘면 쏜다.” 미군 대령의 명령. 30분이 지났을까. 손목시계로 눈이 간다. 5시30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의 색깔이 참으로 곱다. 왜 하필 내가 탄 차가 공격받나, 저쪽에서 쏘면 나도 당겨야 한다. 살아 돌아가면 좋은 경험이고, 죽는다면? 그래. 내 운명이다. 무남독녀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고 믿고 있는 병상의 아버지는? 다행히 저항세력은 콘보이 차량과 몇 차례 교전한 뒤 사라졌다.

'위풍당당' 여군 세상

“침착하게 잘해 줘서 고맙다”는 대령의 한마디. 서로 어깨만 두드릴 뿐 아무런 말들이 없다. “길이 많이 막혀서….” 왜 이리 늦었느냐고 묻는 캠프 빅토리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설명할 뿐이다. 다음날 언론이 시끄러웠다. 이라크전 개시 3년 만에 미군 통근 장갑차량에 대한 적대세력의 첫 공격 사례라고 했다.

정희형(37) 소령. 2006년 8월부터 지난 7월 5일까지 MNF-I 전력계획 및 병력관리 담당 참모장교로, 바그다드 중심부 그린 존 내 미국 대사관에서 재건 담당 작전장교로 일했다. 한국군 장교로선 처음 맡은 자리. 귀국 뒤 합참의장실 정책팀에서 근무를 시작한 그에게 ‘야전(野戰)의 여군’ 모습을 들려달라며 휴일 인터뷰를 청했다. 체크무늬 단정한 원피스 차림으로 나타난 정 소령. 그가 전한 1년의 경험은 민간 작전을 수행하는 아르빌 주둔 자이툰부대의 생활과는 사뭇 다른 듯했다. 23개 동맹국에서 파견된 참모 요원 중 1명으로 생(生)과 사(死)가 오가는 전장을 누빈 기록이었다. 1993년 대학(전남대 영문학과) 졸업 뒤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한 정 소령. 우연히 잡지의 여군 기사를 본 게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 ‘힘들지만 희열을 느낄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39기 여군 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다. 2000년부터 2년간 미 오하이오주 공군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육사 영어 교관으로 일하고 있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MNF-I 측이 영어 잘하는 한국군 장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온 것이다. 여군을 보내도 되느냐는 논란 끝에 그녀는 바그다드행 장교로 선발됐다.

새해부터 옮겨간 그린 존에서는 하루에도 몇 차례 로켓탄 공격 경보가 울렸다. 후세인의 대통령궁을 개조한 사무실 건물은 안전했지만 막사는 아니었다. 그린 존에서의 임무는 이라크 각지, 특히 북부지역의 주민들을 찾아가 이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기존의 사업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돈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조사해 잘메이 할릴자드 대사에게 보고하는 일이다. 4명의 미군 대령·중령과 함께 6개월간 80여 차례 현장을 오갔다.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한 이라크 상황에 힘들어하는 미군들의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근무가 시작된 올 1월부터 저항세력의 공격은 절정에 달했다.

3월 어느 날 동료 장교 4명과 함께 헬기를 타고 키르쿠크·모술 지역으로 가다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아 불시착해 구조 헬기가 도착할 때까지 4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다. 하루는 방 옆의 화장실이 박살이 났고, 두 칸 건너 자고 있던 미군 여군은 천장이 무너져 한쪽 팔을 잃었다. “메이저(Major·소령) 정 갔다 와서 피자 사줄게”. 헬기를 타고 떠난 고어 대령은 돌아오지 못했다. 죽음은 항상 옆에 있었다.

정 소령은 다후크·술레메니아 등 북부 도시를 주로 다녔다. 여성 인권이 취약한 곳이다 보니 여성전용 체육관이나 보육센터 건립 등 여성 장교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었다. 현지 이라크인들이 지금도 감사 메일을 보내올 땐 가슴이 뿌듯하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 때가 언제였느냐고 물었다. 정 소령은 “로켓포가 날아오는 3~4초, 휘잉 하는 바람소리를 듣는 때”라고 했다. 로켓포가 날아온다는 대피 방송이 나오면 모두들 벙커로 뛰어드는데, 그 안에서 듣는 로켓포의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폭발음을 들을 때와 비교가 안 되는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정 소령은 극한에 처했던 이런저런 상황들이 떠올라 비행기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잘못된 전쟁이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한·미 동맹의 현실 속에 23개 나라가 동맹군의 형태로 파병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어난 전쟁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슬픈 이라크를 평화의 이라크로 재건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이 자위대를 철수시켰지만 MNF-I에 파견한 참모 5명은 절대로 철수시키지 않습니다. 족적을 지우지 않겠다는 뜻 아닐까요?”
 
장맛비가 그친 7월 18일 오전 8시. 경기도 일산의 백마부대 신병교육대. 민간인 물이 채 빠지지 않은 훈련병 184명이 사격훈련장으로 가기 위해 산을 넘고 있었다. 지난 2일 입소 후 첫 사격이다. 그 맨 앞자리에 선 3중대장 김정미(27) 대위. 지난 연말까지 2사단에서 소대원을 이끌고 온 산을 헤매다 온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까지 전방의 긴장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김 대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준하는 훈련병 하나하나를 눈 안에 넣는다. “사수 소총 들어” … “조정간 단발” “준비된 사수로부터 사격 개시!” 메가폰을 잡은 김 대위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호하다.

“보병이 잘 맞습니다. 야전에서 생활하는 게 재미도 있고요. 2사단 소대장을 할 때 1년 동안 지뢰 제거하고, 얼음 땅에 철조망 치고, 고생은 했지만 뿌듯함으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야전의 묘미요? 병력을 실제로 지휘하는 것, 힘든 일을 극복했을 때의 희열, 행군·유격을 마친 뒤 부대로 돌아왔을 때 그런 기분이죠, 뭐.”

백마부대에는 4명의 여군 장교가 함께 근무한다. 드문 경우다. 김 대위와 한 중대인 1소대장 박혜숙(26) 소위, 1중대 3소대장 이세리(24) 소위, 그리고 부사관 이하나(25) 하사다.
TV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 대한 느낌을 물었다. 대위인 설칠(이태란 분)과 병사 하남(박해진 분)의 사랑 등등. “하하. 그렇게 살 것 같으면요…. 병사와의 사랑. 글쎄요. 현실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라마처럼 업무가 편하진 않죠. 또 그렇게 다른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

김 대위는 지난 2003년 울산대 아동복지학과를 졸업한 뒤 48기 여군 3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보통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살아보고 싶어서 지원했다. 어머니도 군은 여성들이 노력한 만큼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권유했다. “생계를 위한 직업의 개념으로 군대를 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군은 다른 여성들이 즐기는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정말 투철한 국가관,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부하들을 통솔하기 위해선 신뢰를 쌓도록 스스로를 계속 단련해야죠.”

8개월차 소대장 이세리 소위. 작은 안경 뒤 눈매가 매섭다. “훈련병을 처음 받을 때 그들에게 얘기합니다. 좋은 소대장이 되지 않겠다고요. 제가 혼내주고 제대로 지적해야 배치돼서도 잘할 것 아닙니까.”

주말마다 병사-장교 대항 축구시합에서 최소한 두 골씩을 넣는 인기 만점의 이 소위는 숭실대 체육학과 출신. “체력에 관한 한 자신 있다”고 한다. “군인다운 군인이 되고 싶었다”는 박 소위는 32년간 군에서 복무한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군인이 됐다. 딸만 넷인 집안의 셋째 딸. 큰언니 역시 공군 대위로 근무하다 전역했다.
 

"보병 출신 장군 나올 때"
여군은 현재 전쟁터 이라크의 다국적 동맹군 핵심 장교로, 이라크 평화재건사단(자이툰부대)에서 인술을 펴는 천사로, 특전사 특수임무 대대의 대테러 전사로, 야전부대 현장에서 충혼을 불사르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여자 배속장교들이 제1기 여자의용군 교육대를 창설한 지 57년. 구국의 깃발을 들고 남자 군복을 입은 채 전쟁터로 향했던 500명의 여자의용군 후예들은 현재 4378명(부사관급 이상)에 이른다.

장성이 1명, 대령 9명, 소령·중령이 248명이고 위관급 장교는 2119명이다. 1997년 공군사관학교가 금녀의 벽을 허문 이래 육사·해사 시험에서 30대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을 뚫은 재원들이 군으로 들어오고 있다. 해외 파병을 마다 않는 여군 장교들은 정희형 소령뿐만이 아니다. 함정에 여자는 오를 수 없다는 관습을 깨고, 2005년 해군 최초로 전투함에 여군이 승선했다. 앞서 2002년엔 공군 최초로 여성 전투기 조종사가 실전에 배치됐다.

하지만 여군은 여전히 군대의 소수자.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깜짝 뉴스의 소재로 다뤄지고 있을 뿐 실제 위상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육군 포병과 기갑부대 방공부대를 제외한 거의 전방위 병과로 보직이 확산됐지만 여군 장교 수는 전체 장교의 2.6 %에 불과하다. 정부는 2020년까지 전체 간부 대비 여군 장교 인력을 5%(부사관급은 7%)로 확대할 계획을 발표했다. 여군 복지도 많은 발전을 이룬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보병 출신 여군 장성이 탄생하지 않은 데 대한 여성계의 아쉬움은 크다. 2001년 11월 양승숙 장군에 이어 이재순, 윤종필 현 국군간호사관학교장이 별을 달았지만 모두 간호병과. 현재 국방부 여성정책팀장을 맡고 있는 민경자 대령과 육군본부 인사사령부 병적관리 과장인 추순삼 대령 등은 수 년째 후보로만 거론되고 있다. 야전 경험이 없다는 말들도 하지만 시대 상황상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무시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여군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군의 덕목? 사명감? 그것보다는 소위로서, 소령으로서, 대령으로서 덕목을 생각합니다. 섬세함은 여군의 특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섬세한 남자 군인들도 많죠. 심장의 박동소리 들립니까. 이게 다 조국에 대한 군인의 열정입니다. 금녀(禁女)의 문들을 하나하나 깨고 오늘 우뚝 선 여군!! 위풍당당 여군 앞에 거침은 없습니다!!”라고.

"여자가 더 무섭다고 할 정도로 일에선 확실합니다"

대대 안에 여군 장교 넷을 한꺼번에 부하로 둔 복(?)받은 백마부대 신병교육대 대대장 김영수(41·학군 27기·사진) 중령을 따로 만났다. “사실 제가 여군을 부하로 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인데, 여간 깐깐한게 아닙니다. 특히 김정미 대위는 교관이나 조교들이 ‘여자가 더 무섭다’고 할 정도로 일에선 확실한 모습을 보입디다.”
김 중령은 “여군 부하를 뒀더니 불편하더라” “본인들이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 스스로도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만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민간인을 군인으로 바꿔야 하는 신병대 교육훈련은 병아리를 쌈닭으로 만드는 일인데, 김 대위가 신병들의 심리상태나 가정사까지 고려해 남자 중대장들이 하지 못하는 일도 챙겨냅니다.” 여자이다 보니 통제가 힘든 측면이 있을 법도 한데, 김 대위는 당차게 해나간다는 것이다.
“보병 지휘를 여군이 맡아야 하느냐의 논란은 있습니다. 야전에 가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야전 지휘관이 여군 장교가 오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 파트 등에서 여군의 활동 범위가 점점 더 확실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격 훈련장 훈련병들에게도 물어봤다. 여군 중대장님이 어떠냐고. 김남욱(21) 훈련병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를 훈련시키는 부대 중대장님이란 생각밖에 안 듭니다.” 군기가 바짝 든 듯하다. “험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무게가 있고 카리스마가 느껴집니다.” 강운(20) 훈련병의 말이다.
“10분간 휴식한다!” 김 대위의 명령이 떨어지자 부동자세로 앉아 있던 훈련병들의 어깨 높이도 조금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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