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용서받지 못할 탈레반 인질범들의 만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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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려했던 사태가 마침내 현실이 됐다. 아프가니스탄 무장 반군 세력인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한국인 인질 23명 중 한 명이 그제 밤 무참히 살해됐다.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추가 살인이 이어질 것이란 경고도 잇따르고 있다. 한때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던 8명은 여전히 납치범들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무고한 외국인을 납치해 살해한 행위는 그 어떤 명분이나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인도적 만행이다. 탈레반 납치범들은 인솔자인 배형규 목사의 머리와 가슴, 복부에 무려 10발의 총탄을 난사했다. 배 목사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프간 사람들을 돕겠다고, 위험을 무릅쓴 채 자원봉사자들을 이끌고 그 먼 곳까지 간 사람이다.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토록 참혹하게 죽인다는 말인가. 종교가 다른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평화와 관용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정신에 완전히 반하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다. 이방인들을 환대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파슈툰족의 도덕률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악행이다. 납치범들의 극악무도한 범행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것이 충격과 비탄에 빠진 우리 국민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나머지 인질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노력을 믿고, 정부에 힘을 실어 줘야 한다. 이제 와서 사태의 발단 자체를 문제 삼거나, 정부의 협상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사태가 정리되고 난 뒤 따져도 늦지 않다. 차분하고 냉정한 자세로 사태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옳다.

 우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정부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태가 아닌 만큼 정부는 아프간 정부와 우방 및 이슬람권 국가들과의 공조를 통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모든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한다. 특히 미국과의 공조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테러범과의 협상은 없다는 원칙 때문에 미국의 입장이 난처한 줄은 알지만 동맹국이 처해 있는 곤경을 헤아려 미국은 최대한 유연한 자세로 한국 정부의 사태 해결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범죄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와 문명의 문제다. 죄 없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종교적 가치를 운위(云謂)하고 설파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는 탈레반 납치범들이 진정한 무슬림이라면 남은 인질 모두를 즉각 석방해야 한다. 추가 살인이 이어진다면 그 파장은 길고, 대가는 클 것이다. 탈레반 납치범들은 국제사회에서 높아지고 있는 양심과 문명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고, 갈등을 원치 않는 세계의 대다수 양심적 무슬림들이 이번 사태에 적극 나서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