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화소양” 박 의장의 변명/이상일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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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6일 석명서를 통해 사퇴의 심경을 밝힌 박준규국회의장은 이만저만 억울해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우선 『왜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지,그러 동양적인 체념으로 부덕의 소치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라고 애끊는 심정을 밝혔다. 그래서 그는 『하찮은 재산과 벼슬보다는 명예가 더 중요한 것이며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며 가슴에 담아두었던 억울함과 비통함을 모두 토해 놓았다.
그는 재산이 많은 것은 순전히 유산이 많았기 때문이지 따비밭(작은밭) 하나라도 검은 돈과의 유착 또는 권력남용에 의해 얻은 적은 없다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특히 그는 여론으로부터 가장 호된 지탄을 받은 75가구 다세대주택 임대에 대해 『5공시절의 서민용 장기임대주택 건설이라는 국가시책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오히려 칭찬받을 일임을 주장했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그는 『앞으로 공직자윤리법이나 국회윤리위의 절차에 따른 조사과정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자세한 해명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그가 의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김영삼정권에 대해 한마디 안할리 없다. 그는 『격화소양(신을 신은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다: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뜻)의 감은 없지 않으나 민주주의에는 절차와 방법상의 민주성과 적법성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가치다』
고 했다.
민주주의적 절차 운운하는 것만으로는 비록 성에 차지 않지만 어찌됐든 그냥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뜻이다. 또 김재순 전의장처럼 토사구팽이라고 노골적인 결기를 표출하고픈 마음 간절한데 점잖은 체면에 억지로 참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표현같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여러 말을 하면 자신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풀릴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온축(지식을 쌓음)이 많은 그가 생각이 미치지 못한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그가 일단 유죄가 확정될때까지 형사상 무죄추정원칙을 적용받는 잡범이 아니고 정치인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그에게 문제되는 것은 재산을 어떻게 쌓았는지 일일이 형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국민감정에 어긋나는 과다한 재산보유와 운용으로 많은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정치인은 비록 천금을 잃더라도 한 범부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된다(영실천금말실일인지심). 정치인이 이를 지키지 못했다면 정치적으로 이미 유죄를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음을 박학다식한 박 의장이 모르는 것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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