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명서로 대신한 축재 해명/조용히 물러난 박준규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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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격화소양의 느낌 없지 않다”불만 표현/“철저조사”청와대·당 압력에 무릎꿇은듯
박준규국회의장이 26일 국회본회의에 나타나지 않은채 조용히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본회의에서 신상발언을 하지 않은 대신 석명서를 통해 심경을 밝혔다.
당초 국회에 출석해 명예회복성 신상발언을 강력히 희망했던 그로서는 여간 어려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러나 석명서에서 한 말은 다했다.
『하찮은 재산과 벼슬 보다는 명예가 더 중요한 것이며 「용기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는 선배들의 말씀이 새삼 떠오릅니다.』
『왜 사태가 이렇게 되었는지 그저 동양적인 체념으로 저의 부덕의 소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는 또 의원직을 사퇴한 김재순 전의장처럼 「토사구팽」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김영삼정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즉 그는 『격화소양(가죽신을 신고 발등의 가려운데를 긁는다)의 감이 없지 않으나 민주주의에는 절차와 방법에 있어서의 민주성과 적법성이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고 외쳤다.
박 의장이 이렇게 뻣뻣한 말을 했는데도 민자당 지도부는 일단 그를 받아들였다.
민자당 지도부는 박 의장이 희망한대로 석명서 내용이 국회속기록에 그대로 기재되도록 허용했다. 그 이유는 박 의장이 국회에 나오지 않아준 것만 해도 우선은 고맙다는 생각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사실 당 지도부는 그가 본회의에서 민정·공화계 의원들에게 「토사구팽」의 느낌을 주는 발언을 했을 경우의 파장을 크게 염려해왔다.
그래서 김영구총무 등 총무단은 물론 주돈식 청와대 정무수석까지 나서 박 의장의 자제를 설득해왔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당측은 협박성 설득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의장에게 의원직 사퇴압력까지 가해온 청와대와 당측은 박 의장이 본회의에서 자극성 발언을 할 경우 축재과정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진행시킬 뜻을 지속적으로 전달,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박 의장은 석명서에서 억울하다는 뜻과 함께 의원직 보유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혀 급한 불을 끈 청와대와 당이 앞으로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된다.<이상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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