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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경제] Q : 평·돈·근 등 전통 도량형 정부서 왜 못 쓰게 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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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우리에게 친숙한 전래 속담이나 관용어구들이지요. 공통점은 무얼까요. 바로 옛날식 계량.화폐 단위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지요. 이달 1일부터 미터(m).킬로그램(kg), 리터(L)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표준 계량 단위를 쓰도록 하는 법률이 본격 시행됐어요. '세 치 혀'처럼 앞서 늘어놓은 표현들은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요. '리터(L)로 주고 밀리리터(ml)로 받는다' '내 코가 90cm(석 자)' '말 한마디에 천만원 빚 갚는다'. 뭐 이렇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도량형 괴담'도 떠돈다고 하네요. 애국가 가사 중에 '삼천리 화려강산',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의 '뱃길 따라 200리' 같은 가사를 새 계량 단위로 바꿔야 한다느니, 음주 운전자가 단속 경관에게 '막걸리 한 되 먹었다'고 진술했다가 음주운전 벌금 이외에 50만원의 과태료를 물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을 안해도 됩니다. 관용어구나 속담에 쓰이는 표현,대화에 등장하는 옛 단위들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광고나 상용 목적일 때만 단속 대상이 되지요. 또 평과 돈을 쓰는 경우만 단속하고 나머지는 계도 기간을 더 갖기로 했어요.

◆도량형 어떻게 정비됐을까요=이제 더 이상 쓰지 말자고 당국이 권고한 계량 단위는 꽤 많습니다. 자.리.인치.피트.마일.야드.평.마지기.홉.되.말.갤런.관.근.냥.돈.온스 등등이지요. 사실 우리나라는 이미 1961년에 '계량에 관한 법률'을 채택해 전통 계량 단위를 쓰지 못하게 했어요.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았지요. 2001년에도 정부가 큰 맘 먹고 새 계량단위 시행을 강행했지만 반발 여론으로 잘 시행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좀 살살 하는 분위기입니다. 당장 경제활동에서 폐해가 크다고 하는 평과 돈의 경우만 위반 때 5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기로 한 것이지요.

법정계량단위를 본격 시행한 뒤 20일 정도 지났지만 여전히 불편하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가령 모델하우스 외벽에 33평형 아파트라고 쓰려면 이제 3.3 ㎡를 곱해서 109㎡로 표시해야 합니다. 109 하면 머리에 금세 떠오르지 않지요? 금은방들도 돈쭝 단위를 못쓰게 돼 꽤 헷갈린다고 해요. 저처럼 경제를 담당하는 기자들 역시 기사 쓸 때 새 단위를 일일이 확인해 보고 환산해서 써야 하는 불편이 당장 만만찮네요.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생활 속에 뿌리내린 계량단위를 일시에 바꾸기가 쉽기야 하겠어요. 선진국이고 늘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는 미국만 해도 수십년 전에 미터법,그램법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야드.마일.온스 같은 단위를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관습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수 있지요.

◆도량형을 왜 통일하려고 할까요=이런 불편과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정부가 계량단위를 통일하려고 기를 쓰는 이유는 뭘까요. 역사책을 들춰 보면 도량형을 통일하려는 취지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 정권이나 체제가 바뀌는 경우죠. 중국의 중원 천하를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처럼 집권하면 자신과 정권의 정당성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문물정비라는 걸 합니다. 그때 꼭 끼는 게 도량형 정비지요. 세상이 바뀌었으니 새로운 잣대부터 받아들이라는 상징적인 제스처지요.

또 하나는 실용적인 목적입니요. 조선시대의 조광조 개혁이라든가 구한 말 갑오경장처럼 경제활동의 비능률을 고치려는 경우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두번째에 가깝겠지요. 조선시대를 보면 지역마다 저울이나 자가 달라 물건을 사고 팔 때 불편이 적잖았어요. 탐관오리들은 계량단위를 속여 세금을 더 거두기도 했고요. 조선시대 암행어사라고 하면 흔히 마패를 연상하지만 도량형 표준 기구인 유척을 가지고 다녔다고 해요. 잣대를 일정하게 하는 건 효율적인 경제생활뿐 아니라 사회정의와도 연결되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일단 평과 돈을 먼저 손댄 이유는 뭘까요. 가령 33평형이라고 해 봅시다. 오차 때문에 주택업체와 입주자 사이에 분란의 소지 있다는 거예요. 한 평이 3.3㎡이니까 세탁기 한 대 정도 놓을 수 있는 공간 오차는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지요. 돈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돈이 3.75g이니까 반 돈 같은 물량을 셈하다 보면 0.005g 같은 자투리를 피차 손해보기 쉽습니다.

사실 국경없는 국제화 시대에 잣대가 같은 게 유리하다는 건 상식에 속합니다. 수출이나 수입을 할 때 잣대가 다르면 클레임을 받지요. 도량형을 통일해야 한다는 명분이 힘을 얻는 것 같습니다. 다만 홍보 계도 기간을 충분히 두고(정부는 이미 충분히 뒀다고 주장하지만) 계량단위 별로도 개혁 속도의 완급을 조절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습관을 쉽사리 바꾸기가 여간 어려워야 말이죠. 더욱이 동.서양의 계량 단위는 척관법이나 야드법을 막론하고 우리 신체의 크기나 주변 사물의 무게 등을 기준으로 오랜 시일을 두고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정서와 DNA에 깊숙이 박혀있는 잣대들이지요. 당분간 도량형 통일을 위한 진통은 부득이하게 지속될 것 같네요.

홍승일 기자

◆도량형(度量衡)=문자 그대로 자(度)와 되(量)와 저울(衡) 로 길이와 부피와 무게를 재는 걸 말합니다. 국제단위계(SI)라는 게 기준이 되지요. 국제적으로 확립된 길이.무게.부피 등에 대한 단위체계로 m(미터, 길이), ㎏(킬로그램,질량) 이외에도 s(초, 시간), K(켈빈, 온도), cd(칸델라, 광도), A(암페어, 전류), mol(몰, 물질량)' 일곱 가지가 기본 단위로 돼 있어요.(www.bipm.org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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