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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북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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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는 노동당의 결정이 단번에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후계자 결정에 따른 안팎의 저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빨찌산 그룹은 대책수립에 골몰했다. 몇 단계의 조직적 조치를 거쳐야 했다.
전 북한고위관리의 증언과 자료들을 종합하면 첫 단계는 70년의 5차 당대회를 전후한 시기였다.
이 무렵 김정일의 당 중앙위원선츨 여부가「비밀스런 현안」이었다. 김일·최용건·최지등 빨찌산 원로들은『중앙위원이 곤란하다면 후보위원으로라도 올려놓아야 한다』 고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은 선전선동부 부부장이었다. 부부장쯤은 판례상으론 당중앙위 후보위원으로 선츨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들의 나이(세)와 안팎의 비난을 의석, 원로들의 제의를 일단 보류시켰다고 한다.
중앙위 진출 모색「김정일문제」는 곧이어 71년 4월하순 당중앙위 제5기 2차 전원회의 직후에 열린 당정치위원회 회의에서 논의됐다.
전 북한고위관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건강상 조직 비서직무수행이 어려웠던 김영왕이 김정일을 당의 조직사상 비서로 앉히자고 제의했다. 선전선동 사업에서 보인 조카의 업적을들어 능력있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제의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정하자」는 취지였고 원로들도 뜻을 같이했다고 한다. 물론 김영왕는 사전에 김일성과 협의를 가졌을 것이다.
이 증언은 김영왕측과 김정일측이 권력승계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는 일부 관측과는 배치된다.
당시 노동당 일각에선 김정일을「친애하는 지도자동지」후영명한 지도자동지」로 부르며 그의 부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문화예술부문에서 특히 열성이었다. 그러나 조직사상비서에 김정일을 앉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당내의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보류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김정일문제」가 재차 떠오른것은 71년 11월 당중앙위 제5기 3차 전원 회의에서부터 72년 7월 4차회의 무렵이다.
당시는 남북관계가 중요 현안이었다. 적십자회담이 열리고 7·4공동성명이 채택되던 때였다. 전 북한 고위관리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이 무렵 노동당 일각에선 김정일 후계자 부상을 위한 불밑 움직임이 있었다.
72년 4월15일 김일성의 환갑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해 3월 행사준비로 노동당은 눈코 뜰새 없었다.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김일성 환갑을 맞아 원로들이 『김정일에게 대를 물려주자』고 주장하는등 다시 후계자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고 한다.

<안팎저항에 고심>
원로들이 이렇게 주장한데는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해 2∼3월에 김정일이 주도한 부혁명가극 총결산모임이 있었다. 공연 레퍼터리에는『밀림아 이야기하라』『꽃파는처녀』『피바다늪』이 포함됐다. 공연을 관람한 원로들은 옛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원로들의 감탄을 자아낸 혁명가극이 김정일에 대한 신뢰를높여주었다는 설명이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이때도 논의는 무성했으나 후계자결정「절차」 는 밟지 않았다고 전한다. 남북관계를 의식한 것이었다. 「김정일=후계자」공식화가 권력세습 비난을 불러일으킬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72년 5월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밀사로 평양에 갔을때는 김영주가 당 조직지도부장자격으로 그를 만났다.
그러나 이 무렵 후계자 지명준비를 본격화 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친북학자 이노우에슈하치씨의 저서 믈대조선과 김정일서기 에 따르면 일례로 김정일은 72년 6월에 양강도 혜산시에서 보천보전투 승리 35주년 기념행사를 조직했다. 이 활동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의 항일빨찌산부대가 국내에 진공해 전투를 수행한 사례로 선전돼온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이 기념행사를 지도했다는 건 그가 「항일혁명전통의 계승자」임을 당원과 주민들에게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으로 「김정일문제」가 다뤄진 건 사회주의 헌법을 만든 72년 10∼12월 즉, 당중앙위 제5기 5∼6차 전원회의 무렵이다.
5차회의는 헌법외에도 당원증 재교부사업문제를 다뤘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당원증재교부사업을 회의에서 제의한 사람이 바로 김정일 이었고 사업 진두지휘자도 그였다고 밝힌다. 새 당원증의 도안· 제작을 직접 맡았을 뿐 아니라 교부사업 진행도 관장했다는 것이다. 당원증에 김일성 사진을 새로 넣었고 커버를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바꾸었다.

<일부당원 몰아내>
이 사업은 단순한 당원증 교환에 그치는게 아니었다. 「당원재심사」라는 정치적 뜻이 담겨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중앙정보부가 77년에 발간한『북괴간부 및 당원학습자료』는 당시▲주체사상이 확립돼있지 않은 당원▲수령교시를 관철하지 않는 당원▲기술혁신운동에 소극적인 당원▲당조직 생활에 태만인 당원◆사상투쟁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당원들이 문제됐음을 확인해 주고있다.
김정일은 당원증 재교부사업을 전두 지휘함으로써 당조직 업무를 장악하고 일부당원을 당에서 내몰았던 것이다. 후계자 지위확보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의 성격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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