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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古今을 한 몸에 품은 상하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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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18면

도시의 여러 얼굴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아마도 공장과 허름한 건물 사이에 초고층 빌딩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서울의 남서쪽에서 도시의 명암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을 굳이 찾자면 광화문이나 종로 일대의 사대문 안쪽 정도. 복원된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 혹은 한옥들 위로 솟은 큰 건물들이 서울이라는 공간 위로 흘러간 세월을 말해준다. 오래된 도시라면 모두 켜켜이 쌓인 시간의 두께를 이고 있게 마련이다. 로마·런던, 혹은 파리와 같은 유럽의 고도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공간을 품고 있는 도시는 스스로 긴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식민과 이식의 역사를 겪은 아시아에서 많이 찾을 수 있다.

주일우의 과학문화 에세이-이미지에 걸린 과학 <5>

천의 얼굴을 지닌 도시
여러 시간과 공간을 품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상하이의 상징이라는 와이탄(外灘)에 서면 이곳이 런던의 템스 강변인지 상하이의 황푸 강변인지 헷갈린다. 1.7㎞나 늘어서 있는 오래된 서양식 건물들은 유럽의 도시를 옮겨 놓은 풍경이다. 고개를 돌려 황푸강 건너 푸둥(浦東) 쪽을 바라보면 높이 463m의 TV 송신탑인 둥팡밍주(東方明珠)와 진마오빌딩(金茂大厦)을 중심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마천루 숲이 있다. 한쪽에는 서양 근대 건축의 전시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현대 건축의 실험실이 있는 셈이다. 거기에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중국의 전통 정원 위위안(豫園), 지금은 옛 모습을 잃었지만 오(吳)나라 시절 건립돼 1750년이나 된 징안쓰(靜安寺)가 있다. 상하이에 가면 동서고금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상하이가 이렇게 많은 얼굴을 가진 도시가 된 이유는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1842년 맺은 난징(南京) 조약으로 이곳을 개항장으로 내주었기 때문이다. 이때 상하이의 실권이 외국인들에게 넘어갔고 외국인의 자유로운 활동과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열린 공간에 서구의 건축물이 올라갔다. 마치 곡예쇼를 하고 있는 것처럼 건축 실험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 푸둥과 새로 개발되는 지역의 건물들은 2010년에 열리는 상하이 국제박람회를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하이 여행의 별미, 科技館
화려한 풍광과 복잡한 역사를 음미하는 것이 상하이 여행의 정해진 코스처럼 되어 있지만 과학을 테마로 여행을 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우선 눈에 띄는 곳은 ‘상하이 자연박물관’. 여행안내 책자들은 한결같이 이곳을 별로 재미없는 곳, 먼지만 쌓인 곳, 인적이 뜸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양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와이탄의 왼쪽 끝에서 옌안둥루(延安東路)로 접어들어 조금 걷다보면 오른편에 나타나는 이 박물관에 들어설 때까지도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박물관의 어두운 입구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다.

1923년에 지어진 낡은 건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여느 자연사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목이 긴 거대한 공룡 화석.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목이 긴 공룡의 대명사인 브라키오사우루스가 아니고 중국에서 발견된 마멘키사우루스(合川馬門溪龍)라는 점이다. 이 박물관의 많은 공룡 화석이 중국 국내에서 발견된 것이다. 인류의 기원과 관련된 전시물 속에 섞여 있는 인류 조상의 뼈 화석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동물의 박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컬렉션을 갖추고 있다. 전시장 관리가 허술하고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연의 역사를 실물을 통해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의 소장품을 물려받고 커다란 중국 땅덩이 곳곳에서 모은 자료는 런던이나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우리나라 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빈약한 컬렉션 때문에 느끼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최근에 상하이 과기관(科技館)이 개관하면서 자연박물관은 과기관의 일부로 개편되었다. 과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푸둥의 둥팡밍주에서 시작하는 새로 생긴 큰길. 덩치 큰 중국에 걸맞게 지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새 건물에 들어 있다. 여행안내서는 과기관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다. 이곳에서 중국을 볼 수 없다거나 크기에 비해 볼 것이 없다는 혹평이 많다. 공항 로비처럼 깔끔한 인상의 과기관에 들어서면 커서 약간 썰렁한 감이 없지는 않다.

처음 들어서면 만나는 전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상현실을 구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다른 과학관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과학의 원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우주인을 직접 우주로 내보낸 중국의 우주과학, 그리고 산업화 때문에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환경오염에 대한 기술적 대응과 관련된 전시들이 이어진다. 중국의 미래를 보여주려고 짓고 꾸민 이곳에서 중국 고유의 풍취를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다. 과학기술을 통해 산업을 일으키고 잘살아 보고자 하는 중국 사람들의 희망을 감안하면 왜 이런 형태의 전시를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즐길 거리도 적지 않다.

우주선 쏘아올린 중국 저력의 바탕
상하이는 훌륭한 동물원·식물원·수족관도 갖추고 있다. 3000여 종에 달하는 식물군과 열대우림을 갖춘 식물원이나, 110m에 달하는 투명 수조를 갖춘 수족관은 규모나 다채로운 면모에서 훌륭하다. 특히 상하이 서남쪽 교외에 자리 잡고 있는 동물원은 인상적이다. 상하이에서 가장 생태 환경이 우수한 조경림을 가지고 있는 이 동물원에서 판다를 비롯한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볼 수 있다. 600여 종, 6000마리에 달하는 동물들과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다면 새벽에 동물원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새벽 체조를 하러 나온 중국 사람들에 섞여 들어가 관람객들이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한 동물원을 산책하는 것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 지은 과기관을 제외하면 낡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여러 과학 관련 시설들의 겉모습에 지레 방문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물질과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이루어 온 성과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이 시설들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구하고 일하고 있을 인력의 수를 생각하면 우주선을 쏘아올린 중국의 저력이 짐작된다. 상하이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대화하고 아시아와 서구가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흥미로운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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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화학,역사학,환경학을 공부한 주일우씨는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에 관심이 많은 과학평론가이자 문화공간 ‘사이’의 운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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