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70. 여성골퍼 급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1976년에 열린 제1회 한국아마추어부녀골프선수권대회에서 허정구(中) 대한골프협회장이 우승자 국화정씨에게 트로피를 주고 있다. [대한골프협회 제공]

 한국골프 50년 역사를 뒤돌아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한 부문은 여성골퍼의 급증이 아닐까 싶다.

 1950년대만 해도 국내엔 여성골퍼가 거의 없었다. 소아과 의사 최호 박사의 부인과 정형외과 의사 문병기 박사의 부인을 포함해 열 명이 안 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여성골퍼의 옷차림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요즘은 알록달록한 색깔에 멋진 디자인의 복장이 필드를 수놓지만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성골퍼들은 골프복을 입고 필드에 나왔지만 여성들은 보통 바지와 치마 차림에 밀집모자 같은 것을 쓰고 나왔다. 여성골퍼용 의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여성골퍼들의 차림새는 농사꾼을 닮았었다.

 그때는 골프장 캐디가 모두 남성이었다. 국내 프로골프 초창기 때 내 캐디였던 김과일씨는 나보다 열 살 이상 많은 아저씨였다.

 골프장에 여성캐디가 등장한 것은 60년대 중반부터였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속캐디를 뒀었다. 태릉골프장에 박 대통령을 전담하는 안씨 성의 여성캐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골프장에도 박 대통령의 전속캐디가 있었는데 까다로운 신원조회를 거쳐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성골퍼 전용 라커룸도 몇 개 없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KLPGA투어 초창기에 대회를 여는 골프장은 남녀 라커룸을 바꿔 사용해야 했다. 요즘 골프장은 여성 라커룸를 계속 늘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 여성골프는 60년대 중반 안양·태릉·뉴코리아·한양CC 등 골프장이 곳곳에 생기면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골프장 캐디로 필드와 인연을 맺은 여성골퍼들이 70년대부터 선수로 전향했다. 이것이 본격적인 여성 골프선수 육성의 틀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구옥희가 80년대 중반 일본에 진출해 스타가 되고, 박세리가 미국으로 가 9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뒤부터 한국 여성 프로골프는 세계 최강의 전력으로 도약했다. 지난달 열린 US여자오픈에 무려 44명의 한국인 선수가 출전해 여덟 명이 톱 10에 든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KLPGA를 결성할 때 한 명의 선수라도 더 합격시키려고 티잉 그라운드를 맨 앞으로 당겨놓고, 핀도 아주 쉬운 곳에 뒀던 게 엊그제 같다.

 최근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 투어에 진출해 있는 한국인 여성 선수의 부모로부터 “미국투어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오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뛰려면 시드전을 따로 치러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KLPGA가 외국 투어에 진출한 한국인 여성골퍼들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실력 있는 골퍼가 모두 LPGA투어에 도전하다 보니 국내 투어가 부실해지고 있지 않은가. LPGA투어에 도전해 큰 돈을 벌지 못하는 선수들이 국내로 쉽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야 한국골프도 살고 경쟁력이 생긴다. LPGA투어에서 뛰던 선수가 한국에 올 경우 최소한 국내 투어 대회의 절반이라도 시드권을 주는 게 좋을 듯하다.

한장상 KPGA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