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도올고함(孤喊)

부처를 죽이고 나면 내가 곧 부처라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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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기독교가 믿음이라면 불교는 물음이외다. 피자집에는 콜라가 제격이지만, 콜라를 모르는 자에게 콜라를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소. 마시고 트림이 거억 나올 때야 콜라 맛을 안다오. 오늘 오신 손님네들 트림이나 실컷 하고 가소."

주지 명진 스님의 개회 법문. 지난 토요일(7일) 강남 봉은사 보우당은 한국불교학회의 학술토론 현장을 목도하려는 불자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논문 발표는 정예로운 젊은 학자 5명이 했고 총론 발표와 사회를 내가 맡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3시간 동안 유지되었고, 수백 명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경청했다. 대한민국의 종교문화도 이 정도 되면 세계 지성사의 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그 구도적 자세의 진지함은 은산철벽도 뚫어버릴 준열한 기세였다.

불교는 본시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에도 자력(自力)이 있고 타력(他力)이 있지만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력을 본위로 삼는다. 그런데 토론의 주제로서 '믿음(saddh?, sraddh?)'을 끌어들인 것은 색다른 시도였다. 경북대의 임승택 교수는 초기 경전 '니까야'에 나타나는 용례를 들어 믿음이란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일 뿐이라고 설파한다.

7일 봉은사에 운집한 한국불교학회 참석자들. 앞줄 이평래 회장(左), 명진 스님(右).

그리고 깨달음이란 결국 어떤 신비적 사유의 비상이라기보다는 고(苦).집(集).멸(滅).도(道) 사성제에 관한 소박한 깨달음이라고 강조하고, 초기 불교의 수행방법은 점오점수(漸悟漸修)일 뿐이라고 선포한다. 금강대 안성두 교수는 깨달음은 진여(眞如)의 깨달음인지라 언설로 도달될 수 없고 언설로 검증되기 어렵다 하는 패러독스를 제시하고, 믿음은 둔근자(鈍根者)를 위한 방편일 뿐이므로 중관(中觀)과 유식에서는 폄하되고 있다고 말한다. 여래장사상은 인도 불교에서는 사소한 한 교설일 뿐이었는데 중국 불교에서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었다고 지적했다. 밀교 전공자인 진각대 허일범 교수는 깨달음은 결코 언어도단의 세계가 아니요, 부처님의 신(身).구(口).의(意) 삼밀(三密)을 통해 표현된 것이며, 그 삼밀을 실천한 라마들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통해 증득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훌륭한 아사리(스승)와 훌륭한 제자 간의 믿음이 불교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연세대 신규탁 교수는 대승원교(大乘圓敎)로서의 화엄불교가 말하는 진심(眞心).일심(一心)을 상세히 설파하고 인간의 본성은 본시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했다. 창원전문대의 이덕진 교수는 간화선(看話禪)의 중요성을 상술하면서 간화의 핵심은 신심(信心)이요, 분심(憤心)이요, 의심(疑心)이라 말했다. 의심이 끊임없이 일어나 의단(疑團.의심덩어리)이 형성되어야 비로소 확철대오의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 같은 '돌대가리'가 깨닫는 데는 유리하겠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했는데 부처를 죽이고 나면 곧 내가 부처라니 그 부처는 또 웬 말이냐?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야 할까? 예끼! 큰일날 소리를 하는구먼. 나는 말했다. 문제는 내가 몸을 가지고 사는 존재라는 데 있는 것 같소. 노자는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큰 환난이 있는 까닭은 오직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몸이 없는 데 이르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느뇨?(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예수의 법신(法身)이나 싯다르타의 법신이나 진리의 몸으로 보면 같소이다. 뭔 얘긴지 궁금컬랑 매주 일요일 중앙SUNDAY에 절찬인기리 연재되고 있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를 구경하시구료. 보우당의 청중은 희색이 만면했다. 환희봉행(歡喜奉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