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세 '신참' 작년 77대 1 공채 뚫은 지역난방공사 한식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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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근(54.사진)씨는 한국지역난방공사 1년차 신입사원이다. 지난해 9월 이 회사에 입사했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에,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과 경쟁해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한씨가 응시한 7급 기술직은 12명 모집에 900여 명이 몰려 7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한씨의 입사 동기 107명 대부분은 아들.딸뻘이다. 1953년생으로 최고령인 그와 최연소인 84년생 입사자의 나이 차는 무려 31년.

한씨는 지난해 1월 한솔제지 장항공장에서 과장으로 명예퇴직했다. 회사를 그만두자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34년간 기계와 씨름한 그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명퇴금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불과 2년. 자영업을 해볼까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포기했다. 경험도 없는 데다 퇴직자들이 너도나도 가게를 차려 경쟁이 너무 치열했다.

무엇을 해볼까 고민하던 어느 날 한국지역난방공사 채용 공고를 봤다. 지원 자격에 나이 제한이 없다는 문구를 보고 눈이 번쩍 띄었다. 다락방에 있던 책을 꺼내 읽고, 문제집을 사서 풀면서 필기시험을 준비했다.

최종 면접 때 젊은이처럼 세련되게 자기 홍보를 하지는 못했지만, 차분하게 살아온 경험을 얘기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합격 소식을 듣고 아내, 큰아들(25)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했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큰아들도 취직 준비를 하고 있다. 부자가 함께 뛰어든 취업 전쟁에서 아버지가 먼저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이다. 한씨는 "일 잘하는 젊은이도 많은데 나이든 내가 공기업에 취업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지금도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들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한씨는 서울 마포구 당인동 지역난방공사 운영부 통제센터에서 아파트단지와 사무실에 열 공급이 제대로 되는지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직속 상사인 과장은 한씨보다 서너 살 적고, 같은 팀 고참은 열 살 이상 젊다. 동료들은 그를 '선생님' '형님'으로 불러주고, 그는 이들을 '과장님' 'OO씨'로 부른다. 정년이 58세여서 앞으로 4년밖에 더 일할 수 없다. 월급도 심야근무수당을 합쳐 200만원이 채 안 돼 전 직장에 훨씬 못 미친다. 그래도 그는 매일 아침 출근할 곳이 있다는 데 감사하며 산다. 그는 "기업에서도 임금피크제 도입 등 운영의 묘를 살려 근로자들이 현장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기업도, 근로자도 함께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했다.

2005년 이후 공기업 신입사원 공채에서 나이 제한이 없어지면서 한씨와 같은 고령자들의 입사가 늘고 있다. 지역난방공사의 지난해 일반공채 입사자 107명 중 35세 이상 고령자는 10명이나 됐다. 최근 공채에서 33세 이상 신입사원은 ▶기술보증기금 8명▶조폐공사 6명▶한전 7명▶수자원공사 4명▶국민연금관리공단 4명 등이었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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