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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크의 한인들/“평온”속 생활기반 탄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타슈켄트=김석환특파원 4신/한국기업 잇단진출에 “고국배우자”/회교민족주의 확산이 가장 큰 불안
타지크의 한인들이 내전의 장기화로 동요하는 것과는 달리 이웃 우즈베크의 한인들은 요즘 이곳에 불기 시작한 한국바람에 술렁이고 있다.
한국의 삼성·대우 등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이곳을 유망한 투자대상으로 지목,방문의 빈도를 높이고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인사들이 한국을 중요한 나라의 우선순위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삼성이 실시한 후진국 및 개도국 경제인·기술자 연구교육프로그램에 참가했다는 호자예프(대외경제부 국장)는 『우즈베크에는 약 20만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며 『최근 증가하고 있는 우즈베크와 한국의 경제협력에 이들 한인들이 가교역할을 훌륭히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호자예프처럼 작년 한햇동안 한국기업체의 연수프로그램 등의 혜택을 보아 한국을 다녀온 우즈베크 기술자·기업인은 50여명에 달한다.
물론 사업차 한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이나 한국에서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을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다.
여기에 최근 대우가 우즈베크에 티코 등 자동차합작을 적극 추진하면서 지사를 설치했고,카리모프 대통령은 『한인들이 우즈베크 경제부흥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며 한인들을 적극 독려해 요즘 한국붐이 조용히 일고 있다.
물론 극히 일부 과격파 민족주의자들이 한인 등 비우즈베크계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로 인한 민족차별의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다는게 현지 한인들의 이야기다.
페르가나주 지사 비탈리 편,타슈켄트 동방대학 한국어과 학과장 김문욱교수 등은 『오히려 요즘 우즈베크에서는 한국을 알자,한국과의 경제교류를 늘리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고,이에 따라 한글을 배우자는 열기가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타슈켄트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우스마나세라 거리.
이곳엔 또렷하게 한글로 『타슈켄트 광주한글학교』라고 쓰인 동판을 단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91년 10월 광주시의 독지가들이 소리소문없이 지원해 설립한 구소련 지역내 여섯군데 한글교육기관중 한곳인 이 학교엔 한인 3세,우즈베크인 등 1백40여명 학생들의 한글공부하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고 있다.
전남대 국민윤리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이곳에 와 교장으로 일하고 있는 허선행씨외에 한국에서 온 선생님 네명과 현지의 한글선생님 세명이 이곳 한인 3세들과 현지인들에게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타지크 한인들이 내전의 장기화로 인해 경제적 기반을 잃은 채 동요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곳 우즈베크 한인들은 대부분 미래에 대한 희망에 차있다.
이미 우즈베크내에서 확고한 사회·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있는데다 이슬람계 카리모프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한인들은 교육수준·기술수준이 높아 우즈베크의 경제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민족』이라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1일 타슈켄트 중심 나바이 거리에서 만난 한인 3세 이 블라디미르는 『일부에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한인에 대한 차별을 특별히 느낀 적이 없다』며 『요즘 우즈베크내에 투자진출을 하는 한국계 기업에 취직하려는 우즈베크인들의 한국과 한국기업에 대한 질문공세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라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인구 1백40여만명의 대도시 타슈켄트에서 한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2% 정도인 15만여명.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를 약 40만명으로 볼때 이중 절반정도인 약 20만명이 우즈베크에 살고,이중 75%가 타슈켄트지역에 살고 있다.
우즈베크·카자흐·타지크 3국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옥토,페르가나주지사 비탈리 편을 비롯해 우즈베크 지방경제장관,대학교수,국영기업의 공장장,집단농장 책임자 등 소위 출세한 사람들도 상당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대부분 한인들의 교육열이 높아 고등교육을 받은 수의 비율이 타민족에 비해 높고,고급 기술직을 위시해 우즈베크의 주요 외화수입원인 면화 등의 생산기술 진보,영농 등에서 타민족과 비교가 되지 않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표면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갈수록 드세지고 있는 회교민족주의 열풍이 한인들의 장래를 불안케하는 최대 요소다. 우즈베크 회교부흥당·비를리크(운동) 등 회교민족주의 단체들은 국민 대다수인 회교도 사이에서 급속히 세를 넓혀가고 있다. 이들은 타지크사태에 자극받은 카리모프대통령이 최근 강력한 「회교근본주의 세력 소탕작전」을 벌이는 바람에 겉으로는 한풀 꺾여있는 상태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던 모스크(회교사원)의 숫자가 수천개로 늘어난 것처럼 이들의 득세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한인들은 더이상 배겨날 수 없을 것이 뻔한데다 마땅히 갈곳도 없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원죄처럼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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