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성호기자의현문우답] 저울로도 못 다는 무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시인 소동파(小東坡·1036~1101)를 아세요? 당송(唐宋) 9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죠. 당시(唐詩)는 매우 서정적인데, 그의 시는 매우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의 경지(詩境)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죠. 학식이 높았던 소동파는 웬만한 스님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대사(大師)’란 소리만 듣는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 소동파가 당대의 큰스님이었던 승호(承皓) 스님을 찾았습니다. 승호 스님이 물었죠.
 
“그대의 존함은 무엇인가.”
 
소동파는 ‘저울 칭’자를 쓰며 답했죠. “저는 ‘칭(秤)’가입니다.” 사실 중국에 ‘칭(秤)’이란 성씨는 없습니다. 잠시 후 소동파는 “세상의 내로라하는 도인들을 달아보는 저울입니다”라고 말했죠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승호 스님은 벼락같은 소리를 ‘버럭’ 질렀죠.
 
“하~알!”
 
깜짝 놀란 소동파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승호 스님이 물었죠. “이 소리는 몇 근이나 되는가?” 천하의 소동파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동파는 이렇게 읊었다고 합니다. “산색(山色)’은 그대로가 법신(法神)이고, 물소리는 그대로가 설법이다.” 
 
이 일화는 스님의 ‘한판승’입니다. 그럼 소동파의 급소는 뭘까요. 바로 ‘저울’입니다. 소동파의 저울은 뭔가요. 학식, 즉 배움과 앎이죠. 소동파는 ‘내가 배운 것’과 ‘내가 아는 것’으로 상대의 무게를 쟀던 겁니다. 그런 저울은 상대도 ‘배움과 앎’으로 똘똘 뭉쳤을 때만 상대적인 무게를 따질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승호 스님은 딴판이었죠. 배움을 넘은 자리, 앎을 여읜 자리에 서 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무게가 없는 자리죠. 동시에 온 우주를 담은 무게이기도 합니다. 푸른 산, 흐르는 물, 날아가는 새, 묵묵한 소나무, 들녘에 핀 숱한 꽃들이 모두 ‘나’를 여읜 자리에 있으니까요.
 
이들을 몽땅 저울에 올려야만 무게가 나오겠죠. 세상에 그런 저울이 있을까요. 어떤 저울이 이 무한대 온 우주를 담을 수 있을까요. “할! 이 소리가 몇 근이나 되느냐”는 물음에 소동파는 그걸 깨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산색은 ‘그대로가’ 법신”이라고 했겠죠. ‘나’라는 저울을 빼고, 있는 그대로 봐야만 부처의 나라를 볼 수 있으니까요. 거기선 ‘졸졸졸’하는 물소리가 그대로 설법이니까요. 어디 물소리 뿐인가요. 새소리, 바람소리, 빗소리, 모두가 부처의 음성이죠. 부처에게서 나오는 소리니까요. 그럼 소동파의 저울만 급소일까요. 우리의 저울도 급소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저울’로 세상의 무게를 달고, 비교하고, 평하고, 상처까지 주고 받는지 늘 살펴야죠.

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