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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계 원주민의 해" 특별기획시리즈|「아리랑」잘 부르는 아이누 촌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홋카이도에 살고 있는 60세 이상의 아이노 촌로 들은「조선의 민요」를 구성지게 부를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 리요…』해방직후까지 그들의 마을(코탄) 주변에서「조선아저씨」가 흥얼거리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니부타니 아이누 문화자료 관에서 만난 가와카미유지(64)씨는『전쟁 중 동네부근 철도공사장이나 역 근처에 모여 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은 어린 눈으로 봐도 매우 신기했다』면서 누가 아리랑이나 도라지를 선창하면 모두가 즐겁게 따라 불렀다고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라카와 정의 한 양로원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김권식씨(또·일본명 가네야마 노부오카). 아이누사회에서 그는「과거를 잃어버린 불쌍한 조선할아버지」로 통했다. 16세 때 일본으로 건너와 탄광, 철도공사장, 막노동판을 헤매다 손가락이 잘린 김씨는 일본인을 피해 해방 전 아이누 마을에 숨어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의 한글을 깨우칠 사이도 없이 일본의 오지 홋카이도로 끌려온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실어증에 걸려 그의 정확한 과거 내력을 알 수는 없다.
구시로에 거주하는 아이누 후치(할머니), 도츠카 하루(79)씨도 어릴 때에 조선인을 처음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구성진 조선민요>
『다 헤어져 너덜너덜해진 흰옷바지를 입고 윗통을 벗은 조선인들이 매일 산 속에서 석탄 차를 끌었어요. 어느 날 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한사람이 들어왔지. 아버지는 잠자코 그 남자를 집에 재워 줬어요. 아버지는「샤모(일본인을 경멸해 부르는 아이누언어)에게 알려서는 안돼」라며 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어』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1주일 후 그 조선인은 소리 없이 사라졌고 아마도 다른 마을(코탄)로 갔을 거라고 아버지가 일러줬다. 이런 얘기는 아이누사회에 수없이 많다.
오가와 류기치(57·아이누 민족문화전승회장)씨의 아버지 이씨(당시 나이 40세 추정)가 일하던 히타카 산맥 건너편 태평양연안 황금도로공사장도 아이누마을에서 멀지는 않았다. 1934년 완공될 때까지 수많은 인부가 도망쳤으며 아이누마을에서도 이 공사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한글발음 그대로「아이고 죽겠다」길로 통했다고 오가와씨는 기억했다.
오가와씨는 자신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타고난 조선인 아이누가 약 3백 명은 될 거라고 추정, 우타려 협회를 통해 이들의 한국 내 인척 찾아 주기 운동을 펼 생각이다. 그러나 조선인을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 태어난 조선인 아이누 1세, 2세들 대부분이 사회적 차별을 우려해 자신의 신분을 숨져온 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귀띔했다. 나카무라 가즈코라는 이름의 아이누 여인(53·니부타니 출생)은 자신도 강제연행조선인 아버지(임씨로 기억)를 갖고 있으며 해방직후 이복오빠를 부산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 있으나 연고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기자에게 하소연했다. 일본정부가 90년 6월 노동성자료로 공식 발표한 강제징용 자는 해방 전까지 66만7천6백84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중신원이 확인돼 명부가 우리 정부에 전달된 숫자는 지난해 말까지 12만9천여 명에 불과하다. 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방문 때 명부조사를 공식으로 요구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나 일본정부의 무성의로 지지부진한 형편이다.
홋카이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지난 12월 8일 요코미치 주지사가 도의회 답변에서『93년부터 홋카이도는 강제연행 조선인노동자를 독자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학대 못 이겨 도망>
도 당국이 이처럼 애써 성의 있는 자세를 보이려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양심적인 재야 민간단체들의 역사발굴작업이 최근 들어 매우 활발해지고 있으며 강제징용 자의 명부확인도 이들의 적극적인 운동결과 상당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홋카이도지역 조선인 강제징용 자의 실태연구는 15년 전인 78년 결성된「민중사발굴 북해도 연락협회」가 주축이 되고 있다. 홋카이도 역사교육자협의회를 비롯한 18개 연구단체(2천여 명)가 탄광·도로공사장·발전소·댐·군용시설 등을 샅샅이 뒤져 가며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 서린「연행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민연구 단체는▲「강제연행 한국인유족의 방일을 실현하기 위한 모임」(회장 단바 세츠로)▲「소라치 민중사강좌」(사무국장 도노히라 요시치코)▲「삿포로향토를 찾는 모임」(회장 이시다 쿠니오).
이들의 활발한 활동은 매장허가서, 사찰소장 과거장(사망자기록) 발굴 등을 통한 명부확인에 그치지 않고▲유골발굴▲유족 찾기 및 유골송환▲위령 비 건립 등에까지 미치고 있다.「강제연행유족 방일실현모임」은 지난해 10월 8일 홋카이도로서는 처음으로 6명의 한국인 유족을 초청, 삿포로와 쿠시로에서 두 차례 시민집회를 갖고 강제 연행 자 위령제를 올려 화제가 됐다.
전쟁말기 홋카이도 동부 시베쓰 지역에 건설한 최대규모의 육-해군 비행장에 파묻힌 강제징용자의 한을 풀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행사였다.
당시(1942∼45년) 4곳의 비행장건설에 투입된 조선인은 연인원 약 5천 명. 이들의 참혹한 강제사역 실태는 이곳에서 죽은 27명의 사망기록이 91년 3월 발견되면서 드러났다. 향토사학자 마츠모토 시게요시(홋카이도교육대학 쿠시로 분교강사)씨의 집념이 4년만에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비행장 건설현장 가까이 있던 한 사찰에서 발견한 과거장(사망 기록)과 동사무소에 보관된 매화 장 허가증을 대조한 결과, 놀랍게도 8세의 어린 조선인 노동자도 끼여 있었다. 박일 랑이라는 사망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하다가 기아와 학대에 못이긴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이 고향인 박의 사망원인은 폐렴, 사망일자는 45년 6월 15일. 지난해 비행장을 찾아간 유족 중엔 박 군의 형수 김수한씨(64)씨도 끼여 있었다.
마츠모토 시게요시씨는 유족방문을 계기로 1백여 명의 회원과 함께 비행장터를 중심으로 유골발굴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까지 10여 차례 시도했으나『아직 발견 못했다』는 보고다.
정부가 하지 못하는 일을 민간차원에서 벌임으로써 대신희생자와 한국 민에게 사죄하고 싶다는 게 이들 시민단체활동의 이유다. 구성원은 지역의 승려·목사·변호사·의사·도의회의원·교사·재일 한국인과 조총련 등 다양하다.

<신분노출 꺼려>
홋카이도북부 후카가와(심천)지역의 양심적 지식인단체「소라치 민중사강좌」는 또 다른 강제연행의 현장을 끈질기게 발굴하고 있다.
전쟁 전 최대규모의 발전소 댐 공사로 이름난 슈마리나이 댐이 바로 그곳. 기록에 따르면 38년부터 43년까지 약 3천 명의 조선인이 끌려와 혹사당한 깃으로 돼 있다. 홋카이도 최대의 발전소로 탄광개발과 군사시설용수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댐 근처에서 지금까지 모두 16구의 조선인유골을 발굴, 이중 2구를 지난해 3·1절 날 한국 내 유족에게 전달해 관심을 끌었다.
17년 전 댐 근처 절(광현사)에서 다량의「주인 없는 조선인위패」를 발견하면서 이 단체도 노히라 요시치코(48·일승사 주지)사무국장의「유골 찾기 고행」은 시작되었고 사망 기록부를 일일이 대조해 본적지에 메아리 없는「사자의 편지」를 본인에게 띄우는 작업이 계속됐다.
도노히라씨는 82년과 91년 두 차례 한국의 7곳 유가족을 방문, 유골의 인수를 권했고 이중 충청북도 음성이 고향인 박해복씨(43년 사망·당시 28세)와 임상봉씨(42년 5월 사망·당시 34세·본적지 경기도 파주)의 유가족과 유골을 전안「망향의 동산」에 묻기로 합의를 봤다. 반세기만의 환국 엔 일본인 회원 15명이 참가했고 이중엔 조선인 아이누 오가와 류기치씨도 끼어『아버지』를 소리 없이 되뇌었다. 【삿포로=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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