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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느긋한 아침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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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03년의 끝에서 몇해 전 이맘 때 '유순(由旬)'을 말했던 것을 되살린다. '황소가 하루 가는 거리'라는 뜻으로 작은 유순이 40리, 큰 유순이 80리다. 하지만 올해의 삶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 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다급함으로 기록될 뿐인 듯하다.

그 때문인지 미국의 언론인 존 건서(John Gunther)가 말한 'All happiness depends on a leisurely breakfast'(모든 행복은 느긋한 아침 식사에 달려 있다)가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지난 6월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이 그림을 그려 만든 '러브 북'(마음산책 발간)에서 만난 이 글귀가 일순간 뇌리에 날아와 꽂혔던 기억이 새롭다.

'과연 언제쯤 그런 한가한 아침을 맞을 수 있을까'라는 혼잣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굳이 고급 휴양지의 화려한 식탁이 아니라도 좋을 것 같았다. 작은 정원에 놓인 평상에서, 아니면 산과 물이 있는 골짝 토담집 대청마루에서 소박한 밥상을 차리고 맑은 사람들과 마주앉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이런 고민을 하자니 문득 지난달 26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창비사 주최 만해문학상 시상식에서 소설가 박범신씨가 전한 수상 소감이 떠올랐다. 사연인즉슨 그가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모 신문사 교정부(요즘의 교열부) 면접 시험을 볼 때의 일이라고 했다.

당시 청년 박범신은 여관비를 아끼려고 지방에서 전날 밤 열차로 서울로 올라와 새벽길을 오들오들 떨며 걸어서 신문사 사장실 앞 면접 대기실에 들어섰다. 그러자 여비서가 두번씩이나 나와 이렇게 말을 건넸다. "사장실에 들어가면 카펫 위 분필로 그린 동그라미 두 개가 있으니 거기 두 발을 나란히 딛고 면접에 임하라."

순간 그에겐 터무니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두 개의 동그라미를 못 찾을 것 같은, 그래서 면접을 망칠 것 같은…. 급기야 순서가 돌아왔다. 청년은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분필로 그려진 동그라미를 찾는 데 혈안이 됐다. 아뿔싸! 우려한 대로 동그라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허둥댔다. 가뜩이나 털이 긴 카펫에 그려진 동그라미가 앞 사람 발길에 뿌옇게 지워졌으니 선명하게 보일 리 만무했을 것 아닌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까스로 분필 자국을 찾아 발을 딛고 서려는 순간, 어디선가 "당신 영어와는 아예 담을 쌓았구만…"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신문사 사장의 말이었다. 결국 그는 허망하게 고향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에 노심초사했다는 심한 자괴심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는 카펫 위 동그라미 두 개를 찾느라 허둥대며 살지 않으리다." 이렇게 그는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하필 아침이 화두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아침형 인간으로 변신하라'(다키이 노부오 지음), '아침형 인간' '아침형 인간 성공기'(이상 사이쇼 히로시 지음) 등이 서점가를 휩쓰는 와중, 아침도 늦다며 '새벽사람 전성기'(오정현 지음), '새벽 2시에 일어나면 뭐든지 할 수 있다'(에다히로 준코 지음) 등도 선을 보였다.

'아침형 인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른 아침의 생각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다. 반면 늦은 밤에는 왠지 비관적이고 감상적으로 바뀐다." 요컨대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해 성공의 기회를 잡으라는 메시지다. 갑신년 새해엔 모두에게 느긋한 아침식사가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허의도 사사편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