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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연 내금강 … 금강산 불교 유적지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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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1~23일 북한의 금강산(金剛山)을 찾았다. 외금강에서 그쳤던 금강산 관광이 처음으로 내금강까지 길을 텄다. 법기(法起) 보살이 1만2000명의 제자를 데려와 한 명씩 앉혔다는 1만2000개의 봉우리, 그리고 8만9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금강산은 전체가 거대한 ‘불국토’였다.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수행의 흔적, 부처의 숨결이 흘렀다. 게다가 신계사, 표훈사, 장안사, 보덕암, 마하연, 묘길상등 전설처럼 내려오는 불교 유적지가 구석구석 박혀 있기도 했다.

 천하절경의 대명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그런데 금강산은 ‘금·수·강·산’의 줄임말이 아니다. ‘금강산’이란 명칭은 불교의 '화엄경' 에서 나왔다. 부처님이 사는 동해 한가운데 있다는 산 이름이다. 뿐만 아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적은 '금강반야바라밀' 도 줄여서 '금강경' 이라고 부른다. ‘금강산’의 금강(金剛), 그건 바로 '화엄경'의 금강이고 '금강경' 의 금강이다. 중국의 육조 혜능(慧能) 대사(638~713)는 '금강반야바라밀경해의(金剛般若波羅密經解義)' 에서 ‘금강’의 뜻을 밝혔다. 석가모니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내린 가르침을 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불렀는지 말이다. 혜능 대사는 “금강석은 귀한 보배다. 또 날카롭고 단단해 무엇이든 부수고 자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금강석을 부수는 게 ‘고양각’이란 산양의 뿔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혜능 대사는 금강석을 ‘깨달음의 성품’에, 고양석을 ‘번뇌’에 비유했다. 깨달음의 성품이 비록 야무지나 번뇌가 쉬이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번뇌도 지혜앞에선 절로 무너진다고 했다. 이런 뜻만 알아도 ‘금강산’은 각별한 산이 된다. 금강, 깨달음의 성품, 그 속살이 내금강에 있었다.

 금강산 외금강의 신계사를 찾았다. 거긴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1888∼1966) 스님이 출가한 곳이다. 와세다대 법대를 나온 그는 일제시대 첫 조선인 판사였다. 그러나 조선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끝내 법복을 벗었다. 엿판을 들고 전국을 방랑하던 그는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출가했다.

 효봉 스님은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깨닫기 전에는 절대 바깥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며 신계사 건너편 법기암의 토굴에 들어갔다.

용변 보는 구멍 하나, 밥 넣는 구멍 하나만 뚫어 놓고서 입구를 막아 버렸다. 그리고 하루 한끼만 먹으며 정진했다. 1년 반이 지나서야 효봉 스님은 토굴을 부수고 나왔다. 머리카락도 길고, 손톱도 아주 길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도송(悟道頌깨달음을 얻고 짓는 게송)을 읊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꼬

흰 구름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누나

 효봉 스님은 캄캄한 토굴의 어둠 속에서 바다도, 제비집도, 사슴도, 알도 하나가 되는 경지에 오른 게 아닐까. 흰 구름이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어도 본질은 제자리에 있음을 깨친 게 아닐까. 그래서 ‘오고 감이 없음’에 몸소 들었지 싶다.

신계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고 말았다. 3년전만 해도 빈 터에 탑과 비석만 뒹굴었다. 지금은 옛 모습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남측의 목수들과 북측의 단청 공예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거기서 혜해(87) 스님(경주 흥륜사 선원장)을 만났다. 그는 1944년 신계사에서 출가한 비구니 스님이다. 61년 만에 금강산을 다시 봤다는 그는 “산은 옛모습 그대로다. 다만 산사가 온데간데없다”며 아쉬워했다. 혜해 스님의 기억 덕에 잡초에 덮인 법기암 터도 찾을 수 있었다. “거기서 옛노래 ‘황성 옛터’를 불렀지.”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 옛터야 잘 있거라’란 대목에서사람들의 눈가가 젖었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내금강으로 향했다. 기기묘묘한 바위투성이인 외금강은 무척 남성적이다. 반면 올망졸망한 산세와 다소곳한 풍경의 내금강은 퍽 여성적이다.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 온정령에 섰다. 거긴 외금강과 내금강의 경계였다. 1951년에 뚫었다는 500m 길이의 온정령 터널을 지나자 산세가확 달라졌다. 뾰족한 바위산의 외금강이 ‘양(陽)’이라면, 동글동글한 바위와 산세의 내금강은 ‘음(陰)’이었다. 그렇게 깨달음의 성품에도 음양이 있었다. 그건 또 둘이 아니었다. 외금강과 내금강이 어울려 금강산이 되듯이 말이다.

 놓칠세라 버스 안에서 북한 여성 안내원이 시를 한 수 읊었다. ‘인류 천만년의 천만마디의 말은 부끄러워라/말과 노래, 끊어진 곳에 금강산이 솟아 있어라’란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찔렀다. 실제 그랬다. 금강산을 향한 온갖 수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금강산은 그냥 서 있을 뿐이었다. 온전한 아름다움, 그 자체로 말이다.

 표훈사를 찾았다.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장안사, 표훈사, 신계사) 중 폭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절이다. 기와도 낡았고, 기둥도 남루했다. 머리를 깎지 않은 북한의 표훈사 주지 스님이 방문객을 맞았다. 주 법당인 ‘반야보전’ 뒤가 청학대였다. 옛날에 청학이 내려 앉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금강산이하도 푸르러 백학조차 퍼렇게 물이 든 걸까.

하긴 선의 세상에서 백학과 청산이 둘이겠는가. 백학 속에 청산이 깃들고, 청산 안에 백학이 사는 법이려니.

 내금강 산길을 올랐다. 100m쯤 가니 ‘금강문’이 나왔다. 맞붙은 두 개의 큰 바위 밑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랬다. 그건 금강, ‘깨달음의 성품’을 향한 입구일지도 몰랐다.

오랜세월, 숱한 이들이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봤지 싶다. 안으로 들어섰다. 물은 맑고, 계곡은 깊고, 하늘은 파랬다.

1.6㎞쯤 들어가자 절벽에 얹힌 암자, 보덕암이 나타났다. 그 자체가 묘기였다. 구리 기둥 하나에 의지한 보덕암은 내금강의 미(美)적 상징물이다. 숱한 화가들이 미술사에 담기도 했다. 왜 하필 절벽에 걸쳤을까. 바람이 불면 삐걱거릴 정도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했다.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기감,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그렇게 날이 선 긴장감 속에서 선승들은 자신을 비워 나갔을까. 암자안으로 들어간 김종규(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씨는 “밖을 보니 정말 허공에 앉은 듯하다. 마치 ‘부처님 나라’에 온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머물던 선승들도 그렇게 땅을 여의고, 하늘까지 여의었지 싶다.

 내금강의 미적 상징물이 보덕암이라면, 선(禪)적 상징물은 단연 마하연 선방이다. 66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마하연사는 ‘화엄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 선실은 1848년(헌종14년)에 지어졌다. 1900년대 초에도 ‘남 운문,북 마하연’으로 불릴 만큼 한강 이북에서 가장 컸다는 선방이다.

 얼마나 컸던지 전해지는 일화도 흥미롭다.

수좌들은 마하연 선방에서 한 철(석 달 동안 산문 출입을 않고 수행에 정진하는 동안거 혹은 하안거)을 같이 나고도 해제할 때얼굴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혜해 스님은 “옛 선방에는 상판과 하판이 있었다. 구참(선방의 고참) 스님이 앉는 상판과 젊은 스님이 앉는 하판으로 구분돼 서로 얼굴을 보기가 어렵기도 했다”며 “더구나 안거 중엔 묵언이 기본이라 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마하연 선방의 크기는 무려53칸이나 됐다고 한다.

 그런 마하연도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돼버렸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었다. 우거진 잡초 사이로 큼직한 주춧돌, 무너진 계단석만보였다. 아궁이가 있던 자리는 푹 꺼져 있었다.

그 아래로 구들장이 보였다. 만공, 효봉, 청담, 성철 등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여기서 화두를 들었다. 그들은 ‘이 뭣고’를 외고, 또 외며 ‘나’를 허물었을 것이다.

내금강 암벽에는 여기저기 한자로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들 옛날에 판 것이다.

그게 인간의 욕망이었다.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이름도 깊이 새기는 법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강철같은 화강암에 새긴 이름조차 세월에 깎이고 있었다. 이름도 깎이고, 바위도 깎이고, 산도 깎이고, 세월도 깎인 자리. 삼라만상이 몸을 깎은 자리에 ‘금강(金剛)’이 있다. 그 ‘금강’이 온 산을 덮을 때, 금강산과 불국토가 둘이 아니지 싶다.

금강산=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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