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비켜간 산,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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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찾기 위해 산을 오른다는 말은 공허하다. 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앞에 펼쳐진 길보다는 뒤돌아보는 길이 아름다운 것처럼, 사람들은 뒤에 두고 떠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집을 떠나 산을 오르는지도 모른다.

1. 불경이 적힌 돌 옆을 지나는 대원들. 히말라야에서는 불경이 적힌 돌의 왼쪽을 걸어가야 한다.


종교의 발상지는 대개 인간이 살기 힘든 곳이다. 윤회에 대한 기대라도 없다면 이곳에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일지 모른다. 문외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고작 600m 안팎의 고도에서 놀던 사람에게 3000m 이상 동네에서 산다는 것은 우선 숨쉬기가 어렵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정나미가 떨어진다. 기왕에 고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보자. 히말라야 등반은 고소증세를 빼고는 어차피 이야기가 안 되기 때문이다.

기초 등반 능력은 히말라야 등반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고산에서의 적응력이다. 젊고 건장한 산악인들이 3개월의 원정기간 내내 고소증세에 시달리다 제대로 된 등반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결국 허무하게 하산하는 경우도 목격했다. 고소증세는 멀쩡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력하게 만든다.
해발 5000m에서 대기 중 산소량은 해수면 산소량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고도 8000m의 산소량은 해수면 산소량의 3분의 1로 더 떨어진다. 그럴 리야 없지만, 바닷가에서 놀던 사람을 헬기에 실어 8000m 고도에 내려놓으면 수분 이내에 사망한다. 평소의 체력이나 나이는 고소증세와 별로 상관이 없다. 체력이 좋다고 자신할 수도 없지만 약하다고 미리 주눅 들 이유도 없다.

히말라야엔 7000m급 산봉우리가 350개,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14개 있다. 이 14개의 주봉 외에 위성봉으로 홀대를 받다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독립적 성격을 가진 봉우리로 대우가 변한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이게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다. 2000년 세계에서 8번째,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기록을 수립한 산악인 엄홍길씨는 2004년 얄룽캉을 등정한 데 이어 지난 5월 31일 로체샤르 정상 등정에 성공해 세계 최초로 8000m급 ‘14좌+2’의 꿈을 이루어냈다. 정상 정복의 꿈을 안고 엄 대장 일행이 로체샤르 베이스캠프까지 걸어갔던 길은 풍광이 수려하고 비교적 평탄해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중 ‘고속도로’급으로 손꼽힌다.

엄 대장 일행의 경로를 간단히 되짚어보자.
■ 루크라(해발 2100m)
비행장이 있는 산간 마을이다. 어떻게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할까 궁금할 만큼 절벽 위에 만들어진 활주로가 손바닥만 하다. 비행기가 가면 ‘문명’도 가고, 이동수단에 관한 한 그때부터 ‘원시’가 시작된다. 100m를 가려면 100m를 걸어야 한다. 무엇인가 옮겨야 한다면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지고 가야 한다. 에누리도 없고 효율도 없다. 바퀴가 없는 세계가 시작된다. 산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2. 아마다블람을 배경으로 서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히말라야의 천연기념물 산양. 3. 히말라야의 야생화. 꽃의 크기가 지름 1cm 정도로 작다. 4. 로체샤르 원정대의 짐을 나르는 포터들.


■ 몬주(해발 2800m)
백두산 정상 높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체중만큼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 등반대원은 바로 이 광경을 보면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럴 만했다. 걷기만 해도 헐떡거리는 외부인들에게 체중만큼의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주민들의 모습은 경이 그 자체다. 트레커들은 대개 여기서부터 호흡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포터가 쉬 지쳐버리는 고용주를 애처롭게 지켜보는 시간도 마찬가지로 점점 길어진다.

■ 남체(해발 3400m)
로체와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최대 규모의 마을이다. 제대로 된 샤워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마을이다. 그러나 흘린 땀을 씻어내겠다고 덜컥 찬물로 샤워를 한다거나 냉장고의 캔 맥주를 아무 생각 없이 꺼내 평소처럼 마셨다가 여지없이 고소증세에 덜미를 잡히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고소증세는 대개 몸의 열기가 식었을 때를 노려 찾아오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면 기존의 상점 외에 장터가 서기도 한다. 바리바리 짐을 짊어진 사람들이 산길을 따라 줄지어 장터로 내려오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남체에는 ‘노스 페이스’와 ‘밀레’ 등 세계 유명상표 제품을 취급하는 등산용품 상점이 많다. 가격은 놀랄 정도로 저렴하지만 품질은 믿을 수 없다. 거의 대부분 짝퉁이기 때문이다.

■ 탕보체(해발 3800m)
남체로부터 해발고도 차이가 400m에 불과하지만 가장 길고 두려운 구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굽이굽이 고갯길이 인내심을 고갈시켜 마침내 진절머리 나게 만든다. 도를 닦는 심정으로, 전생의 업보를 씻는다는 마음으로 걷지 않으면 자칫 제풀에 지쳐 발길을 돌리게 될지도 모른다.
원정이 끝나고 본격적인 몬순이 찾아왔던 6월 초. 안개에 싸인 이 길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무마다 꽃이 만발했고 이름 모를 야생화도 지천으로 피어났다. 잡초마저 꽃만큼 예뻤다. 고통에 취해, 꽃에 취해, 잠시 뒤에 두고 떠나온 것들에 대한 생각에 취해 오르다가 마침내 비탈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는 마을이 탕보체다. 라마 사원과 숙소 몇 군데가 전부인 마을. 땀을 식히는 바람이 부처의 말씀처럼 상쾌하다.

■ 팡보체(해발 4100m)
반드시 마음에 담아가야 할 길이다. 원시림 사이에서 부드럽게 피어오르는 안개, 잔디가 덮인 부드러운 흙길, 돌담, 이름 모를 꽃과 향기,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 출렁거리는 구름다리, 그리고 그 위로 솟아오른 아마다블람의 아름다움은 이제까지의 피곤함을 한순간에 날려보낼 만큼 강렬하다.

■ 딩보체(해발 4600m)
수목한계선을 돌파하며 본격적인 고소증세에 노출되는 지점이다. 베이스캠프에 들어갔다가도 고소증세가 심각해지면 다시 나와 체력을 보충하는 곳도 여기다. 아낙네들이 계단식으로 만든 밭에서 감자와 야채를 키우는 모습도 이곳이 마지막이다. 영농 한계지역이다.

■ 추쿵(해발 4800m)
마지막 인간 거주지. 숙박업소 몇 곳이 전부다. 봄ㆍ가을 등반 시즌이 끝나면 대부분의 주민이 상가를 철시하고 밑으로 내려간다. 체력이 좋고 고소 적응능력이 뛰어난 트레커들의 발길도 여기서 끝난다.
많은 사람이 산을 오른다. 산에 오르는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를 꿈꾼다. 전기가 들어오고 일부 인터넷이 되기는 해도 아직 히말라야는 인간의 문명이 한 발 비켜간 ‘문명소외지역’이다.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점에서 등산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다. 무엇인가 찾기 위해 산을 오른다는 말도 공허하다. 사실 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앞에 펼쳐진 길보다는 뒤돌아보는 길이 아름다운 것처럼, 사람들은 뒤에 두고 떠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집을 떠나 산을 오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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