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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장률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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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구화의 시기, 여행자와 떠돌이의 시대다. 이주를 하고 여행을 할 뿐만 아니라 집이나 일터에 있을 때도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케이블이나 위성 TV 채널을 통해 전 세계의 이야기와 드라마를 접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은 지구화에 대한 영감에 찬 비판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화는 상층부나 중간층 사람들에게만 자유 이동을 허용한다. 이 시대에도 강제 이주와 유사한 삶의 체험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주 노동자들이다.

아직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지만 재중 동포 3세인 장률 감독의 '히야쓰가르'는 문화적 충격과 이주 문제를 다룬 영화다. 올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를 비롯해 바르셀로나 아시아 영화제 개막작 등 주요 영화제에서 소개됐다. '히야쓰가르'는 사막과 초원의 경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막을 소재로 환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 영화로 기획됐는데, 과묵하고 시적인 화면은 초원의 사막화를 막으려는 몽골인 (바털지)과 탈북 여성 (서정)의 사랑을 통해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조망한다.

2005년 한국에서 상영된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 '당시'는 자신의 아파트 안에 갇힌 듯 살아가는 전직 소매치기가 주인공인데 전국 236명의 관객이 들었다. 참담한 결과였지만 예사롭지 않은 영화로 평론가들과 영화광들 사이에 각인됐다. 다음 영화, 그러니까 '당시'와 '히야쓰가르'의 중간 작품인 '망종'은 2006년 개봉 당시 보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망종'은 한 조선족 여성의 기막힌 이야기에 놀라운 영상과 음향을 지닌 수작이다. 망종은 보리를 베어 내고 볍씨를 뿌리는 24절기 중의 하나다. 영화에서는 중국 변방, 초라하게 도시화돼 가는 마음 둘 곳 없는 장소에서 성 매매를 하는 여성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 중에 등장한다.

조선족 최순희는 32세로 남편이 감옥에 갇히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 김치를 팔아 연명한다. 아들에겐 "너는 조선족 새끼다. 조선족이면 조선말을 알아야지"라며 말을 가르친다. 자신의 김치를 사 가던 조선족 기혼 남성과 잠깐 연애를 하게 되지만 그 남자는 부인에게 발각되자 최순희를 성 매매 여성이라고 경찰서에 신고한다. 이후 그녀에겐 더욱 심한 착취와 압박이 가해진다. 아들마저 죽자 그녀는 사회에 대한 복수를 시도한다. 예컨대 김치로 어떤 파국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 김치는 이 영화 속에서 최순희와 아들의 생존.생계를 가능케 했던 것은 물론 조선족이라는 소수 민족을 드러내는 특별한 기호였다. '망종'의 이런 결말은 비극적 파국이면서 동시에 이런 파국을 통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내려는 시도다. 무엇인가를 베어 내고 씨를 뿌리는, 말 그대로 '망종'인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 최순희는 발소리를 내면서 자살 지점으로 암시되는 기차역을 지나 들판으로 걸어 나간다. 장률 감독과 같은 한국계 감독을 포함시켜 한국 영화사를 보면 김기영.이만희, 그리고 '최후의 증인'(1980)의 이두용 감독이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소재로 이러한 역사적 파국의 장면들을 대담하고 비극적으로 다루어 냈다.

장률 감독이 특이한 사례로 보이는 것은 이전의 한국계 감독 영화들과 달리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족이나 탈북 여성과 같은 소수 민족의 삶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는 점이다. 현재는 30년 전 이리(현 익산) 폭발 사고를 다룬 '이리'를 한국에서 제작 중이다. 그의 영화들은 한국 근대사의 질곡 속에서 발생한 강제 이주와 세계화, 아시아적 지역화가 만나 우연찮게 구성된 경계가 만들어내는 효과와 이벤트들이다. 한국 영화사의 주목할 만한 횡단.트랜스.탈영토의 순간이다.

김소영 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