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베리아 3대강 유역 고고학 기행|한반도 청동기·철기기원 더 앞설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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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시베리아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은 고아시아족과 퉁구스족의 조상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이들에 대한 민족학적 비교연구가 민족고고학이라는 이름 아래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고아시아족으로 축치·코략·캄차달·유카키르·이텔만·켓트·길랴크(니비크), 퉁구스족으로 골디(헤체)·에벤키·에벤(라무트)·부리야트·우에지·사모예드 등이 있다. 퉁구스족은 몽고와 터키계로 다시 나누어진다. 몽고계는 브리야트, 터키계는 알타이산에 살고 있는 알타이족과 예니세이강 상류의 하카시족을 비롯해 튜바·타타르·쇼르·츄림·토파·야쿠트 등을 포함한다.
몽고와 터키계는 형질인류학적으로 우리와 사촌간이라 할수 있다. 언어학적으로도 우리언어의 바탕에는 고아시아족의 길랴크어가 원시한반도어로 존재한다. 그 다음 우리말은 알타이어를 공통조어로 하여 부여-신라-현대국어의 순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 신석기시대의 주인공은 고아시아족이, 청동기시대의 주인공은 퉁구스족중 예맥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서기전 1000년에서 서기전 300년 사이를 청동기시대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렵다.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지역의 신석기와 청동기시대 편년은 이 자코보-세보로-키토이-아파나시에보-안드로노보-카라수크-타가르의 순이다. 그 중에서 석관묘라는 묘제로 보아 종래 우리의 청동기시대의 기원을 카라수크(서기전 l000∼700년)와 타가르(서기전 700∼기원 후100년)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타가르문화에서 보이는 청동거울과 칼을 보면 거울배면의 꼭지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칼은 곡검이 아닌 날이 안으로 휘어진 형태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타가르의 청동거울과 칼은 중국의 요동지방과 한반도에서 주로 발견되는 청동기시대 초기의 꼭지가 둘 달린 거친 무늬거울이 아니고 칼도 고조선식(요령식, 또는 비파형)이 아니다. 석관묘와 같은 무덤의 구조에서 우리의 청동기 문화가 카라수크나 타가르문화의 영향을 받았을는지 모르나 유물 그 자체로 보아서는 좀더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최근 우리 청동기문화의 기원과 밀접한 가능성이 있는 장성밖 내몽고의 오르도스 이맹주개구에서 서기전 21∼16세기에 속하는 청동기 유물이 나와있어 주목된다. 따라서 우리 청동기문화의 기원은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나 내몽고의 오르도스 또는 중국 상주의 청동기유물과의 비교에서 더욱더 확실해질 것이다. 만주지방, 구체적으로 요하의 양평 이동은 요령식 동검(고조선식 동검)·거친 무늬 거울·고인돌과 미송리형 단지가 함께 나오는 우리의 고조선지역이다.
이러한 거울과 칼은 초기철기시대(서기전 300∼0)가 되면 한국식동검(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세문경)로 바뀌고 그들의 분포는 주로 한반도에 국한한다. 이는 기자의 동천 및 위만조선(서기전 194∼108년)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때면 중국의 토광묘·철제장검·한우가 한반도에 유입되고 문화도 악랑을 통한 중국화 일색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령의 정가와자유적에서는 고조선동검과 함께 토광묘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 내몽고의 모경구에서는 우리의 경질토기와 꼭 같은 타날문(두드림 무늬)토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 연대는 서기전800년까지 올라간다. 따라서 정가와자의 토광묘와 모경구의 경질토기의 존재는 우리나라 철기시대의 상한을 앞당겨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또 파지리크 지역에 중심을 둔 스키타이문화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문화의 전파문제도 그렇다. 이제까지 우리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로부터의 일방적인 전파만을 생각하고있지 그 반대의 경우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단지 일본의 죠몽·야요이와 고분시대에 끼친 한국문화의 영향을 문화 전파의 증거로 다루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여러가지 문화요소의 종합을 통해야만 우리가 다루려는 우리 문화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연구가 더욱더 실체에 가까워질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의 기원과 전파문제는 어렵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끝>【최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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