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점장 죽인 「금융의 굴레」/이재훈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이희도상업은행 명동지점장은 왜 수백억원의 은행돈을 빼돌린채 죽음을 택했어야만 했을까.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명동지점을 맡았고 딸의 출가라는 경사를 앞두고 있어 행내의 부러움을 샀던 그의 납득할 수 없는 자살을 놓고 호사가들은 그럴듯한 추리소설을 꾸며보곤 하지만 금융계 영업 일선에 있는 사람들은 좀더 각별한 심정으로 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여·수신 금리가 규제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무거운 수신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은행직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무리한 영업이 불가피 하다는 점을 다들 지적하고 있다.
실세금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제2금융권 금리에도 턱없이 못미치는 금리로 예금을 끌어들여야 하니 거액 예금주에게는 명목금리 이상의 특전을 주어야 하고 돈을 꿔가는 사람에게는 사정없이 「꺾기」를 해야만 목표달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상품으로 경쟁하다 보면 이런 편법은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죽은 이 지점장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가 탁월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비결이 사채업자 등 거액 전주를 잘 끌어들이고 양도성 예금증서(CD)의 매출에 발군의 실력을 보인데 있었던 것으로 하나하나 밝혀지고 있다. 이씨의 자금유용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제도적으로 보면 이같은 열악한 금융환경에 의해 그의 자금유용이 구조적으로 강요된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 금융계는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뜻있는 금융인들은 제2,제3의 이 지점장을 만들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금리자유화를 확실히 시행 금융의 굴레를 풀어주는 일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금리자유화가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편법의 구실을 주지 않는 공정한 게임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지점장 사건의 파장이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당국은 또 다시 공금리 인하라는 애드벌룬을 띄웠다. 기업의 금융비용 경감이나 실세금리 인하,주가상승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과연 이 시기에 이런 정책이 합당한 것인지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의 하나 이로 인해 규제금리와 실세금리의 차이가 더 커진다면 또 다른 이 지점장을 낳을 가능성은 없는지 신중히 생각해봐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