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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해외칼럼

G8 정상회담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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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독일 하일리겐담에서 G8(주요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이 열렸다. 결과는 복잡했지만 영향은 예상대로 미미하다. G8 정상회담은 원래 비공식 논의를 위한 것이었고, 친구들이 주말에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듯한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차츰 수개월간 치밀하게 사전 준비를 하고 다양한 국제 현안을 논의하는 비중 있는 외교 모임으로 발전했다. 참가국 지도자뿐 아니라 조언자와 측근 수백 명, 그리고 수천 명의 기자와 반(反) 세계주의자들이 회담장과 그 주변에 모인다. 이에 따라 더 이상 비공식 모임으로 보기 어렵게 됐다.

어떤 이들은 G8 회담이 국제법적인 근거가 없고, 중국이나 한국 등이 참여하고 있지 않아 실질적인 주요 산업국 모임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부국(富國)들이 자신들의 특권과 세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모일 뿐이며, 실질적 해결책보다 형식적 성명을 양산할 뿐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이번 회담도 이런 비판을 비켜 가긴 어려울 것 같다. 올해 회담은 예년보다 더욱 극적인 상황에서 개최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MD)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계획에 맞서 회담 전 유럽을 핵미사일 공격 대상으로 삼겠다는 경고를 했다. 많은 전문가가 이를 두고 새로운 냉전시대가 도래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모스크바가 미국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이를 냉전의 부활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는 역사적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의 강대국이 다른 강대국을 무너뜨리려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러시아는 국제사회로부터 존경받길 원하며, 푸틴 대통령은 자국이 국제무대에서 무시당하던 시절이 끝났음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국민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다.

미국은 MD 시스템 구축을 통해 러시아를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히려 역풍이 되고 있다. 군비 경쟁을 우려하는 독일과 프랑스도 미국의 계획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 푸틴이 폴란드나 체코 대신 아제르바이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긴장이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문제가 완전 해결된 것은 아니다. 미.러 간 갈등은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다.

정권을 잡기 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러시아와 거리를 두는 정책을 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들은 선임자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푸틴과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비판하며 친미(親美) 정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당장 지구온난화 문제가 장애물로 등장했다. G8 회담 전 부시는 이와 관련한 어떤 제안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2050년까지 1990년의 절반 수준으로 낮추려는 교토협정을 이행하려 노력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이번 회담에서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선언이 나오긴 했다. 그러나 부시는 사실 아무런 의무 이행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미국이 지구온난화와 맞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신중하게 검토한다는 데만 동의했을 뿐이다.

정상들은 코소보 문제와 관련한 이견을 좁히는 데도 실패했다. 미국은 코소보 독립 지지를 선언한 반면 독일은 미국 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고, 러시아는 코소보 독립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극빈국 지원 문제도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들은 모두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기념 촬영을 함으로써 회담을 끝냈다. 구체적 결과도 내지 못하면서 단지 사진 촬영을 위해 1억 유로를 쓴다면 이 사진은 너무 비싼 기념품임에 틀림없다.

파스칼 보니파스 프랑스 국제관계 전략문제 연구소장

정리=유철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