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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위한 입시 올림픽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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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89년생, 만 18세, 60만 명. 11월 15일 대학수학능력시험 경기에 출전할 고 3생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고 1 때인 2005년 5월, 중간고사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에서 촛불시위를 했다.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뀐 내신등급제를 반대한 것이다. 그들은 절규했다. "친구가 공책도 빌려 주지 않아요" "피 말리는 경쟁, 우정은 국물도 없어요"라고. 당황한 교육부는 "중간고사를 못 봐도 큰 타격이 없다. 수능 등 다른 것을 잘해도 된다"고 달랬다. 학생들은 이 말을 믿고 교실로 돌아갔다.

2007년 6월, 고 3이 된 아이들은 다시 혼돈에 빠졌다. 시험이 코앞인데 정부와 대학이 경기 규칙을 놓고 엇박자를 내고 있어서다. "내신 1~4등급 동점 처리 검토(대학, 12일)→재정지원 불이익(교육부, 13일)→공식 입장 아님(대학, 13일)→등급별 점수 차등하고, 실질반영률 높여라(교육부, 15일)→최종안 발표 미룰 수밖에…(대학, 17일)."

학생들은 내신이 어느 정도 반영될지, 수능으로 역전이 가능할지 몰라 우왕좌왕이다. 이대로라면 규칙도 모른 채 시합에 나가야 할 판이다. 새 제도는 노무현 정부가 2004년 10월 발표했다. '수능은 점수표시 없이 등급화(1~9등급)하고, 내신은 절대평가로 바꾼다'는 게 핵심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평준화는 절대 깰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집권하자마자 입시를 수술대에 올렸다. 명분은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절감. 공교롭게도 그 첫 적용이 임기 말이다. 수능성적표는 대선(12월 19일)을 7일 앞둔 12월 12일 발표된다. 노 대통령까지 나선 내신 문제로 벌써 어수선한데, 수능등급 구분에 이상이 생길 경우 대선에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른다.

입시 수술은 역대 정권의 단골 메뉴였다.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44년간 11번이나 바뀌었다. 4년마다 '입시 올림픽'을 치른 셈이다. 그 이유가 뭘까. 고려대 권대봉 교수는 "역대 정권이 교육문제를 포퓰리즘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군사정권 때는 국민의 관심을 교육에 돌려 환심을 사려고, 민주화 정권 이후에는 높은 교육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정권마다 입시를 뜯어고쳐도 대학들은 '끽' 소리도 못했다. 수험생들만 죽어났다. 81학번은 여름방학 때 본고사가 폐지되는 날벼락을 맞았고, 94학번은 수능을 두 번 치르고 본고사와 내신도 대비하는 지옥을 경험했다. 97학번부터 수능+학생부+논술의 틀이 잡혔지만 내신 강화.통합논술.수능 등급화 등으로 변경되면서 혼란의 드라마는 계속되고 있다. 내신과외.논술과외가 생겼고 사교육시장만 키운 꼴이 됐다.

사실 정부가 그동안 실험하지 않은 대입안은 거의 없다. 입시 올림픽이 열린다면 금메달감이요, 기네스북에도 오를 만한 기록이다.

입시 올림픽은 차기 정권에서도 계속될 것 같다. 지역 간, 학교 간 실력차를 무시하는 획일적인 현행 평준화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많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들은 너도나도 손을 보겠단다. 이명박 후보는 "대학에 입시권한을 넘기겠다"고 했고, 박근혜 후보는 "평준화 여부는 지역별 투표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다른 후보들도 사교육비 절감, 교육부 권한 축소 등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또다시 입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학생들을 실험 대상으로 내몰아서도 안 된다.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정밀하게 보완해 구체적인 백년대계 개혁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 핵심은 자율이어야 한다.

대학도 책임을 지자. 언제까지 정부 눈치만 볼 셈인가. 소신 있게 입시안을 발표하고 당당하게 인재를 뽑아라. 당장 5개월 뒤 전투를 벌여야 할 60만 청춘들에게 규칙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