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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여성 갑부 니나 왕의 유산 분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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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05면

니나는 남편 사망 후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모습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AFP=본사특약

니나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건 엄청난 유산과 함께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 때문이다.
니나는 1937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 자본의 ICI 페인트공장 직원으로, ICI 대리상 왕팅신(王廷歆)과 사이가 좋았다. 왕팅신에게는 니나보다 두 살 많은 아들 테디(王德輝)가 있었다. 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홍콩으로 이주했고, 그가 세운 회사 화마오는 번창했다. 55년 니나가 홍콩으로 건너왔고, 그해 테디와 결혼했다.
아버지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은 테디는 니나와 함께 화마오를 키워나갔다. 의약품과 화공원료 취급에서 석유제품과 농수산물에도 손을 댔다. 부부가 60년대에 함께 세운 ‘화마오 부동산’은 그룹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고급 아파트 대신 저가 아파트를 짓고, 분양대금도 일시불이 아닌 할부로 갚게 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전략이 성공하면서 70년대 홍콩 최대의 부동산 재벌로 떠올랐다. 그러나 워낙 검소한 생활로 세간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4조원 싸고 영화배우까지 가세 #풍수사와 자선단체 싸움에 변수로 … 유명 변호사 속속 규합

홍콩 사회에 부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83년부터다. 그해 4월 부부가 탄 메르세데스 차량이 총칼로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니나는 테디가 괴한들의 화를 돋울까 우려해 자신이 인질로 남겠다고 했지만, 괴한들은 니나를 풀어주며 테디의 몸값으로 1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침대에 사슬로 8일 동안 묶여 있던 테디는 몸값이 지불되자 풀려났다. 테디와 니나 커플은 이 납치 사건으로 일약 화인 세계의 유명 인사가 돼버렸다. 당시 테디는 니나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너무 쉽게 인질범들의 요구에 응했다는 것이다.

테디의 예상처럼 이는 결국 두 번째 납치 사건으로 이어졌다. 7년 후인 90년 4월 메르세데스 승용차를 운전해 귀가하던 테디가 또다시 납치됐다. 인질범들은 6000만 달러를 요구하며 우선 3000만 달러를 지정된 계좌로 송금할 것을 지시했다. 니나가 급히 돈을 마련해 1차분을 보내려 했지만 범인들이 지정한 계좌가 갑자기 취소됐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 후로 테디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몇 년 후 인질범 중 일부가 잡히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테디가 탄 승용차는 완전 해체됐고, 결박당한 채 거룻배에 태워져 남중국해로 끌려간 테디는 결국 수장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 니나는 3년 가까이 두문불출했다. 94년 니나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모습이었다. 이후 초미니 스커트에 두 갈래로 땋은 머리는 니나의 독특한 패션이 됐다. ‘리틀 스위티’(Little Sweetieㆍ小甛甛)라는 애칭이 붙었고, ‘60세 연령, 40세 외모, 20세 마음’이라는 수식어도 따랐다. 니나는 일에 파묻히는 것으로 슬픔을 극복하려 했다. 새벽 2~3시까지 근무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니나는 “자희태후(慈禧太后)나 우이(吳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청말의 서태후와 현재 중국의 최고위 여성 관료인 우이 부총리가 니나의 우상이 된 것이다. 화마오 그룹은 부동산 외에 호텔과 금융ㆍ교육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나갔다. 화마오 소유 200여 건물에서 나오는 한 해 임대수입만 30억 홍콩달러. 상장하지 않은 화마오 그룹 전체 재산은 1000억 홍콩달러로 알려진다. 니나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보다 부자이며, 아시아 최고의 여성 갑부였다고 포보스는 말한다.

니나는 테디가 죽었다고 믿지 않았다. 홍콩 침사초이에 있는 그룹 빌딩 최고층에 위치한 니나의 집무실 겸 숙소에는 테디의 방이 생전의 모습 그대로 꾸며져 있고, 필리핀 가정부를 시켜 매일 이 방을 청소했다. 그러나 테디 실종 7년 후인 97년 니나는 다시 세간의 무대에 올려졌다. 처절한 무대였다. 왕팅신이 법원에 테디의 사망을 공식 선포할 것을 요구하며, 테디가 68년 작성한 유언장에 따라 자신이 화마오 그룹의 재산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니나는 테디가 90년 작성해 자신에게 주었다는 유언장으로 맞섰다. 재판의 초점은 니나가 제시한 넉 장의 유언장에 적힌 테디의 서명이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였다. 가짜로 판명나면 니나는 유서 위조죄로 종신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니나는 런민(人民)대학물증감정센터 창시자인 쉬리건(徐立根) 등 최고의 감정사들과 홍콩의 유명 변호사들 중 무려 30% 가까이를 동원했으나 2002년의 1심에서 패소했다. 니나로부터 매달 2만 홍콩달러를 받아 생활하던 왕팅신의 배후엔 홍콩과 마카오의 검은손들이 모였다. 재판에서 이길 경우 투자액의 20배를 준다는 조건으로 엄청난 재판비용이 마련됐다. 2004년 2심도 니나의 패배였다. 니나가 제시한 유언장 네 번째 페이지엔 ‘One Life One Love(一生一愛)’라는 네 단어만 쓰여 있었다. 재판정은 테디가 그런 글을 쓸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테디는 냉정하고 무척이나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2005년의 최종심에서 니나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가족 간 재산 분쟁은 언제나 참혹한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니나는 이겼지만 재판 과정에서 본인과 테디의 외도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왕팅신은 마약에 손댄 게 폭로돼 집안 망신살이 뻗쳤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니나는 난소암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한 달 생활비가 3000홍콩달러로 충분했던 니나는 대단히 검약한 생활을 했다. 14년 일한 필리핀 가정부는 일을 그만둘 때 딱 한 번 300홍콩달러를 보너스로 받았다. 니나는 직원들 경조사엔 5홍콩달러만 부조했다. 머리는 자신이 손질하고, 미용실에 가지 않았다. 외부에서 식사할 때엔 햄버거로 때웠고, 남는 음식은 집으로 가져갔다. 테디의 납치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러 갈 때도 택시 대신 버스를 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니나가 갑작스레 세상을 뜬 것도 병원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자신의 병을 3년 동안이나 방치했기 때문이었다고 마카오의 도박왕 스탠리 호는 말했다. 그러나 자선활동엔 열심이었다. 88년 테디와 함께 세운 화마오 자선기금을 통해 홍콩과 중국에서 많은 자선활동을 벌였다. 특히 중국의 저개발 지역인 신장(新疆)과 네이멍구(內蒙古), 간쑤(甘肅)성 등에 많은 투자를 했다.

니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유산을 둘러싼 제2라운드 법정 싸움이 펼쳐질 전망인 것이다. 니나가 남긴 2002년 유서엔 재산의 일부를 노모 등 가족을 돌보는 데 사용하고, 대부분은 화마오 자선기금에 기증한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자선기금의 운용은 유엔사무총장과 중국 총리, 홍콩특별행정구 장관 등으로 구성된 기구에서 감독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니나와 가까운 사이였던 풍수사 토니 찬이 제시한 2006년 유언장은 모든 재산을 찬에게 준다고 적고 있다. 관상을 잘 보는 찬은 테디의 1차 납치 때 테디가 살아있으며 꼭 돌아올 것이라고 조언해 니나의 마음을 샀던 인물이다. 화마오 자선기금 측은 현재 화마오 그룹을 이끌고 있는 니나의 남동생이 중심이 돼 있으며, 찬의 뒤에는 홍콩은 물론 중국 정계의 실력자들이 포진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두 세력은 법정 싸움에 대비해 유명 변호사를 규합하고 있다. 간단히 끝날 싸움이 아니란 얘기다.

이런 와중에 평소 자선활동에 열심인 영화배우 뤼량웨이에게 니나가 유산을 물려주기로 했다는 홍콩 명보(明報)의 보도까지 나오면서 니나의 유산 향배는 더욱 더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니나에게 2심에서 패소 판결을 안겼던 재판관 런이쥔(任懿君)은 판결문에 성경 시편 39장 6절을 인용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지는 알지 못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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