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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냉정한 관계로 변했다/이석구 동경특파원(특파원시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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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친한파 줄어 정치적 타결은 옛말/모든 현안 실무차원서 해결 필요
요즘 흔히 듣는 말이 있다. 한일관계가 역대 최악의 상태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1월 일본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정신대 문제가 부각되면서 무역역조·기술이전 문제 등으로 반일감정이 크게 고조됐다.
한편 일본에서는 일본대로 우익 보수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혐한론이 잡지 등을 통해 잇따라 발표됐다.
이밖에 한국 진출 일본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고 제휴선을 한국에서 동남아로 돌리기 시작했다.
이같은 상황을 두고 한일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태가 됐다고 하는 것 같다. 외견상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한두사람이 그렇다고 하니까 모두들 그렇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한일관계가 악화됐다는데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악화됐다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
우선 한일 정부간 외교문제부터 살펴보자. 양국간에는 현재 무역역조·기술이전·정신대 등 과거사 문제가 외교현안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는 과거부터 있었던 문제일 뿐이다. 새롭게 대두된 외교현안이 아니다. 단지 최근 한국이 외교적 차원에서 일본의 감정을 건드리긴 했다. 예컨대 미야자와총리 방한때 한국이 정신대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나 자위대 파병때 한국내 여론이 군사대국 운운하며 일본의 팽창주의를 경계한 것 등이다. 또 TV드라마에 일왕 저격장면이 방송되고 한국이 러시아와 일본의 북방 4개섬 수역을 포함해 어로협정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감정을 건드렸다.
그러나 이는 한일 양국간 외교 전반을 살펴볼때 아주 사소한 문제다. 일본 외무성이나 주일대사관은 『양국관계가 깊다 보니 이런 저런 충돌과 마찰이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양국은 과거 어느때보다 우호적인 관계』라고 강조하고 있다.
양국간 파이프가 사라져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즉 과거에는 일본 정계 거물 가운데 친한파가 있어 양국간 외교적 문제가 일어날때 이를 다독거려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실무적으로만 해결하려다 보니 조그만 문제가 종종 큰 문제로 비화한다는 주장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정부내에 일본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별 것 아닌 문제들을 잘못 대응해 양국관계를 악화시킨다는 지적이다. 분명히 일본에서 후쿠다 다케오(복전수부)·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전총리 같은 친한파 인사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과거 친한파들이 많았던 것은 한국에 그만큼 「먹을 것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들이 그냥 한국이 좋아 친한파 노릇을 한 것이 아니다. 청구권 자금이나 경제개발 등에 참여하는 일본기업들의 교통정리와 대한로비로 정치자금이라는 떡고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일유착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에는 그같은 메릿이 없어졌다. 반면 수교를 앞둔 북한에는 앞으로 보상금 지급 등 떡고물이 많다. 최근 일본 정계 인사들의 북한 러시는 이를 말해준다. 일본인들은 철저히 타산적이다. 이익이 없으니까 정계인사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엷어지는 것일 뿐이다. 또 이제 한국도 클만큼 커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정치적 타결이 아니라 모든 것을 실무수준에서 하나하나 따지고 넘어가는 외교를 할때가 됐다.
다음으로 양국의 국민 감정을 생각해보자. 솔직히 말해 언제 한국에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었던가.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국민감정은 언제나 일본에 대해 비판적이다. 오히려 최근 민간차원에서 양국 교류가 확대되면서 일본을 제대로 인식,무조건 반일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일본의 대한감정이다. 그런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변한 것이 없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속이 상할 정도로 한국에 대해 무관심하다. 대개의 일본인들은 한국을 잘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일부가 한국에 관심을 갖고 이들이 최근 혐한을 들먹이고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혐한도 최근 한일간 마찰로 생긴 것이 아니고 과거부터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것들이다. 과거에는 과거사 때문에 입밖으로 내는 것을 꺼려왔으나 이제는 속마음을 얘기하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언제까지 계속 사죄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는 것을 놓고 한일관계 악화의 증거로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시장이 메릿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일관계가 우호적으로 됐다고 해서 손해를 보면서 한국에서 장사할 일본인들은 없다.
이렇게 본다면 한일관계가 최근 특별히 변화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 냉정히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챙기는 관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지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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