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펜화기행] 새벽 33번, 저녁 28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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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의 보신각, 종이에 먹펜, 28.5 X 41cm, 2007.

시계가 없던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게 종각(鐘閣)에서 치는 '인경'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먼동이 트는 새벽 4시엔 파루(罷漏)라 하여 종을 33번 쳐 4대문과 4소문을 열었고, 저녁 10시에는 종을 28번 쳐서 인정(人定)이 되었음을 알려 통행을 금하였습니다. 종각의 종을 '인경'이라 부른 것은 '인정'이란 말이 변한 것으로 봅니다.

종각은 태조 5년(1395) 지금의 인사동 입구에 2층 누각으로 세웠는데 태종 13년(1413)에 운종가(雲從街-지금의 종로) 네거리로 옮깁니다. 세종 22년(1440) 동서 5칸, 남북 4칸 건물로 크게 고쳐 짓고 위층에 종을 달고 누각 아래로는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게 합니다. 그래서 종로(鐘路)란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현재의 보신각.

임진왜란 때 종루와 종이 불에 타 없어져 광해군 11년(1619)에 종각을 새로 짓고 세조 14년(1469)에 만든 원각사(圓覺寺)종을 옮겨 답니다. 이 종은 목숨이 끈질겨 숙종 12년(1685)과 고종 6년(1869) 때의 화재에도 살아남았고, 한국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합니다.

종각은 고종 32년(1895) 보신각(普信閣)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순종 3년(1909) 일제가 소리를 못 내게 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국민들은 보신각종을 하루 종일 울려 해방의 기쁨을 만천하에 알립니다.

높이 3.69m, 무게 19.66t의 거대한 원각사 종은 여러 차례의 병화에 손상이 가고 소리도 변해 1985년 8월 15일 현대식 디자인의 새 종에게 임무를 넘기고 517살의 나이로 은퇴합니다.

새 보신각은 세종 때의 규모와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만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쓴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김영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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