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 기자의 헬로 파워맨 - 김윤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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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윤진(사진). 화려하고 도도한 스타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소탈하더라는, 상투적인 얘긴 피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인터뷰 자리에 앉은 김윤진은 검은 원피스 자락을 쓱 걷어올리며 까진 무르팍을 보여준다. 촬영 중인 영화 '세븐 데이즈'로 생긴 상처다. "이틀 동안 비 맞으며 달리고 넘어지다 무릎이 다 까졌어요. 하하." 그뿐인가. 인터뷰 말미 돈 얘기가 나오자 장난스레 지갑을 열어보인다. 1000원짜리 구권이 뭉텅이로 보인다. 이런 그녀니 잔뜩 혀를 굴린 '월드 스타'라는 호칭에 손사래 치는 게 당연하다. "에이 무슨, '로스트'가 210개국에 상영되니 월드 배우라면 몰라도요."

김윤진이 모처럼 고국을 찾았다. 미국 방송사 abc의 세계적 히트작 '로스트'로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른 그다. 8월 '로스트' 시즌4 촬영 개시까지 모처럼 생긴 여유를 국내 활동에 쓰고 있다. 원신연 감독의 '세븐 데이즈'를 찍고 있고, 할리우드 도전기를 묶은 책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해냄)도 냈다.

재미교포 1.5세에 '무연고'로 국내에 데뷔한 후, 인기 정점에서 할리우드로 날아갔던 그녀. '미쳤다'는 주변의 만류 속에 혈혈단신 할리우드에 도전한 지 4년. 우리 배우로는 성공적인 안착이다. 재미교포라 언어장벽은 없었지만 스스로는 "영어를 잘해서도 연기를 잘해서도 예뻐서도 아니다. 오직 하겠다는 열망이 중요했다"고 밝혔다. 도전 자체가 절반의 성공이란 말이다. "이제 출발일 뿐"이라는 그녀는 "평범한 잡화상 교포의 딸로 어렵게 자라, 오직 노력만이 해법이었던 내 환경이 오늘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세븐 데이즈'=유괴된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살인범의 무죄를 입증해내는 여자 변호사의 분투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다. 2004년 '유월의 일기' 이후 2년 만의 우리 영화다. 명배우 설경구('공공의 적')도 괴롭혔다는 법정 대사에 도전한다. 유괴당한 엄마라는 역할 때문에 '밀양'도 못 봤다. "전도연씨가 대단한 연기를 했을 텐데, 만의 하나 영향받을까봐서"다.

그가 맡은 유지연은 한 손에 잡히지 않는 캐릭터다. "모든 걸 알면서도 표현을 억눌러야 하니 촬영이 끝나고 나면 어깨가 쑤시죠. 왜 이렇게 어려운 캐릭터에 끌리나, 자신을 그냥 못 놔두니 자학인가, 저도 이해 안 될 때가 있어요."(웃음)

물론 결정적인 출연 동기는 감독이다. "스턴트맨, 무술감독 출신에 시나리오를 썼고, 굉장히 독특한 분이에요. 하겠다 하면 반드시 하는 사람이라는 게 믿음이 갔죠."

#도전=그가 할리우드로 간 것은 2003년 초. '밀애'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2002년)한 직후였다. (김윤진은 1996년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 1999년 영화 '쉬리'로 각각 데뷔했다). 인기 절정에서 선택한 할리우드행은 의외였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99년에 써놓았던 쪽지가 눈에 띄었어요. '3년, 정상, 돈'. 대충 이룬 셈이죠. 그때 갑자기 제 눈 앞에 불이 확 켜졌어요. 그래, 할리우드로 가자. 제 오랜 꿈을 이루자는 거였죠."

할리우드로 간 그녀는 무명의 아시아 배우로 출발했다. 밤새 자기를 소개하는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직접 에이전시를 찾았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몸에 밴 '한국식 겸양'도 기를 쓰고 털어내야 했다. 31살의 나이도 벽이었다. "할리우드도 똑같아요. 돈은 많을수록, 몸은 날씬할수록, 나이는 어릴수록 좋다는 말이 있거든요."

조연 오디션을 쫓아다니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컸다. 마침내 굵직한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 abc와 각각 계약을 맺었지만 안면마비라는 복병이 찾아왔다.

#'로스트', 그리고 성공의 조건들=난파선 승객이 무인도에 갇히는 '로스트'에서 김윤진이 애초 도전한 역할은 백인 여성 케이트였다. 오디션 직전 '질문 없느냐'는 질문에 "(케이트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까 묻지 않겠다. 모르는 게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 당찬 답 때문이었을까. J J 에이브럼스 감독은 그녀를 위해 '선'이라는 한국 여성을 창조했다. "선은 전형적인 동양 여자지요. '로스트'로 인기를 얻었지만 이후 비슷한 배역이 많이 들어왔어요. '볼스 오브 퓨리'의 섹시하고 코믹한 역할을 매기 큐에게 뺏긴 다음에는, 섹시한 화보 촬영에 적극 응했죠."

한국에서는 여전사, 지적인 이미지가 강한 그녀가 할리우드 카메라 앞에서 과감해진 이유다. "섹시 화보는 일종의 복수심의 결과죠. 하하"

"활동 초 '할리우드를 남자친구처럼 대하라'는 충고를 받았어요. 무조건 저자세는 곤란하다는 거죠. 그렇게 저를 관리하는 데 한국인이라는 게 도움이 됐어요. 예전에는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라며 원망했는데, 단점이 장점이 된 거죠."

#'로스트'를 넘어=김윤진의 과제는 '로스트' 이후다. 한 해에 8~9개월씩 하와이에 살며 촬영하다 보니 다른 활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다. 상대역이 빌리 밥 손튼이라 화제가 됐던 '조지아 히트'도 서로 일정을 맞추지 못해 연기된 상황이다.

"가끔은 인터넷에 '로스트'에 몇 장면 안 나오더라, 미국에서 진짜 유명한 거 맞느냐, 이런 글들을 보죠. 제가 진짜 자부심을 느끼는 대목은, '로스트'에서 30분씩 한국어 대사를 하고 자막처리를 해도 시청률이 안 떨어진다는 거예요. 제작진도 깜짝 놀라고요. 드라마를 통해 한국 배역, 한국 배우,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 가는 거죠. 전 급하게 욕심내지는 않으려 해요. 작더라도 색깔 있고 의미 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고요."

역시 그답게 결론은 노력과 열정이다.

"전 타고난 연예인은 아닌 것 같아요. 노력파죠. 환경 자체가 노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조건이었고요. 10살 때 이민 와서 벙어리 신세를 면하려고 미친 듯 영어 공부를 했고, 배우를 꿈꾼 뒤에는 발음교정, 춤, 태권도 안 배운 게 없어요. 다시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 공부에 매달렸고. 그렇게 어려서 힘들게 자란 것이 지금 저를 만들었으니, 제 인생에 감사할 따름이죠."

그는 할리우드에서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잔액을 보고 부모님께 집 장만 해드릴 생각으로 용기를 냈다고 했다. '솔직한' 윤진씨. 아직 현재진행형인 그의 할리우드 드림을 마구 격려하고 싶어지는 이유다.

양성희 기자 <shyang@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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