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DJ의 노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험난한 한국사의 길은 성공한 영웅의 출현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컨대 백범 김구는 현실정치에서 장렬히 실패함으로써 비로소 위인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산업화의 물꼬를 튼 박정희는 자신이 이끈 개발독재의 놀라운 성취 때문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박정희의 경쟁자이자 걸출한 정치가(statesman)인 DJ가 역사적 과업을 이루면서 개인적으로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 이런 불행한 역사의 기록을 새롭게 고쳐 쓴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최근 DJ의 언행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도를 넘은 훈수정치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던 스스로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뒤집는다. 이는 아무리 선의로 보아도 '지키지 못한 약속' 정도가 아니다. 정치판을 다시 짜기 위해 노골적이고도 노회한 정치적 발언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DJ는 이런 운신(運身)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분수를 지키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인한다. 자신이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범여권의 지리멸렬상이 그를 현실정치 한가운데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요인보다 DJ의 무리수를 부추기는 것은 햇볕정책에 대한 강박적 집착 때문으로 보인다. 경세가(經世家)로서 자신의 평생 작품인 햇볕정책이 12월 대선 결과에 따라 폐기될 가능성을 걱정해 그것을 막을 정치세력을 조직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DJ의 이런 시도는 첫째, 사실의 차원에서 오도된 것이며 둘째, 현실정치의 지평에서 잘못된 것이다. 먼저 한반도 위기를 관리하고 통일을 대비하는 데 있어 그의 말대로 남북의 화해공존 외에 다른 뾰족한 방안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이나 흡수통일은 이성적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의 원론적 설득력은 그만큼 크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햇볕정책이 폐쇄적 도그마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현실의 변화에 눈감은 독단론은 구체적 현실 앞에 좌초하게 마련이다. '핵 무장한 북한'이라는 존재는 햇볕정책의 대전제를 치명적으로 균열시킨다. 그럼에도 DJ의 북한관은 적절한 자기 수정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종래의 정책을 신성시한다. DJ만큼의 비전이나 위기관리 능력도 없는 참여정부는 이런 무능력을 수동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앞으로 어떤 정권도 평화공존의 큰 흐름을 뒤집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때의 화해공존 방안은 자기정정이 가능한 햇볕정책이어야 한다.

둘째, DJ의 행보가 북한 문제를 특정 정파의 정략으로 악용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국가공동체의 대계(大計)를 한탕주의식 재집권전략 밑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DJ의 무리수가 미칠 정치적 해악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DJ의 훈수정치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옥죄어 온 지역주의에 기초한 3김정치의 마지막 유산이다. 훈수꾼이 때로 판세를 정확하게 읽는 이유는 그가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제3자의 입장에서 전체 국면을 냉철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욕에 깊이 빠진 DJ는 제3자도 아니며 객관적 관찰자도 못 된다.

일찍이 DJ는 "일시적으로 살지만 영원히 죽는 길이 아니라, 일시적으론 죽겠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양식 있는 시민들이 간곡히 반대한 차남의 국회 진출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그는 이 발언의 진정성을 스스로 부인했다. '마키아벨리에게 교훈을 가르쳐줄 수 있을' 지경인 최근의 정치적 행보는 DJ가 영원히 사는 역사의 길 대신 일시적으로 살려는 권력 의지의 길을 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