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하라며 보조금이 웬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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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부시 미국대통령은 국제무역 여건을 개선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었다. 여론조사 결과 민주당의 클린턴후보에게 밀리는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미국 농민에게 10억달러 규모의 대대적인 정부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을 여러차례 방문했던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 대표 등 이른바 자유무역주의자들은 한국이 더 이상 농산물에 대한 지원을 해서는 안되며,조속한 시일내에 쌀시장 개방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던 미국이 그렇게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자국 농민을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해도 좋고 다른 나라는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인가. 엊그제까지도 새로운 다국간 자유무역체제(우루과이라운드)의 확립을 주창하며,UR가 실패하면 세계경제가 예측할 수 없는 혼란으로 빠지게 될 것이라고 앞장서서 염려했던게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더구나 둔켈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사무총장이 우리나라에 와 농산물 협상분야에서 한국이 만족할만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UR협상이 지지부진한 한 이유라고 주장하는 시기에 부시의 엉뚱한 선거공약이 터져나와 우리는 더욱 미국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한국은 농업의 국내보조 분야에서는 개도국 우대방침을 적용하고 수매나 차액보상제도 등 시장가격 지지가 가장 큰 쌀은 보조금 감축대상에서 제외하되 콩·옥수수·유채 등에 대해서는 감축계획을 제시하는 등 경제 사회적인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UR의 타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런데도 둔켈은 한국의 쌀시장 개방 예외조치를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GATT는 한국 농업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면,UR의 협상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미국의 대국주의적이며 공격적인 보조금 정책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밝혀야 한다. 유럽공동체(EC)도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항상 다른 나라를 우롱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격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동안 한국정부는 UR 농산물협상 이행계획을 추진하면서 이 협상이 결렬 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비판론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왔다. 이번 미국의 대규모 농업보조금 정책은 한국의 입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 12위권의 무역국가로서 UR협상의 타결이 자국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선거를 빌미로 UR협상 분위기를 깨는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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