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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시위 주동자 많은 민비연은 눈엣가시"|「간첩 올가미」공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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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63년 가을, 서울대정치학과 4학년생이던 이종률 군은 서울시내 세검정부근의 황성모 교수댁을 찾았다. 이군과 정치학과 동기생인 박범진·김경재 등이 졸업을 앞두고 결성한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라는 서클의 지도교수로 당시 서울대사회학과 교수이던 황 박사를 모시려는 목적이었다. 지도교수의 날인이 있어야 정식 학내서클로 학생과에 등록할 수 있었다.
『서클의 주축이 정치학과 재학생이었기에 지도교수도 우리 과에서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정치학과 교수들은「정치바람」을 겁냈던지 아무도 도장을 찍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같은 문리대의 사회학과 교수명단을 뒤적이다 소장학자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황 교수님을 지목하게 됐다. 뜻밖에도 흔쾌치 승낙해주셨다. 하지만 도장 하나 때문에 나중에 그분이 당한 고초를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할 뿐이다.』(박범진씨·현 민자당의원)

<집 방향까지 트집>
초대회장에 이종률(51·현 민자당 서초갑 지구당위원장),총무부장 박범진, 연구부장 김경재(50·현 민주당종로지구당위원장). 이들 4학년생들은3학년 후배이던 현승일(현 국민대총장)·김중태(현 국민당 지구당위원장)·김도현(현 민자당지구당위원장)등을 끌어 모아 제3세계의 민족주의운동에 대한 세미나를 여는 등 통상적인 서클활동을 했다.
이들은 나세르나 네루는 물론 카스트로도 민족주의운동의 시각에서 연구하는 등 당시로서는 진보적 성향을 띤데 다 회원 중 다수가 한일회담 반대시위 등 각종 데모에 적극 가담해 차츰 정보당국의 주목을 받게됐다. 4년 후인 67년7월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동백림(동베를린)거점 북괴 대남 적화 공작 단 사건」의 1차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황성모교수도간첩혐의로 연행 조사중이라고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서울대를 졸업했거나 재학중인 민비연 회원들에게도 간첩혐의가 씌워졌다. 황성모 박사 (66·전 정문연한국학대학원장)의 부인 서봉연씨(59·서울대심리학과교수)의 회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바깥양반이 집을 나가더니 웬 지프에 실려갔어요. 그 후 사흘 간이나 소식이 끊겨 파출소에 심인계도 내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습니다.3일 후 정보부원들이 들이 닥쳐 가택수색을 했지요. 그때 우리 집(종로구 부암동)은 북악산을 바라보게끔 지어져 있었는데 한 수사관이 그러더군요.「산꼭대기에서(다른 간첩이)빛으로 신호를 보내면 자기 집에서 마주 응답하려고 일부러 산을 향해 지은 집에 들었다」고 말입니다. 기가 막힙디다.』

<친구·친척들 기피>
며칠 후 정보 부로 불려간 서씨는『당신의 남편은 간첩』이라는 통보를 듣고 그 자리에서 까 무라 쳤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서씨가『증거가 있느냐』고 묻자 수사관은『이렇게 많다』며 수북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거의가 황 교수의 자필로 되풀이한 성장 이력 같은 자술서 보따리.『이런 것이 도대체 증거가 되느냐』고 항의했지만 수사관은 오히려 한술 더 떠『통상 부부는 둘 다 간첩인 경우가 많은데 황성모는 아주 독하고 용의주도해 혼자만 간첩이었다』고 말했다. 얼마 후 신문에 다른 동백림 사건 관련자이름과 함께「간첩 황성모」의 이름과 얼굴사진이 실리기 시작했다. 황씨 집에는 친구·친지들로부터 걸려오던 일상적인 전화가 신기하리만큼 뚝 끊겼다. 부인 서씨가 아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면 대부분 질겁하며『전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왔다. 도움이 되어 줄만한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도『왜 왔느냐. 다시는 오지 마라』는 대답뿐이었다.
당시 7O대 노인이던 서씨의 친정어머니는 중앙정보 부의 수사결과 발표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면서「간첩」을「첩」으로 잘못 알아들었다. 친정어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씨 집을 찾아와 고향(경상도)사투리로 딸에게『야이야, 황 서방이 첩(첩)을 얻었다 카드 마』고 걱정해주었다. 극도로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서씨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 교수는 정보 부에서 당한 고초에 대해『살아남은 것만도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뜻이다.
그는 또 자신이 간첩으로 몰린 데는 민비연 서클의 지도교수였다는 점말고도 정치적인 사연이 따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황 교수는 연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수시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려가 나라 일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기도 하고 가끔 함께 대작도 하던 입장이었다. 더구나 그는 민정이양(63년)을 앞두고 행해진 공화당 사전조직에 깊숙이 간여했었다.

<박대통령과 친해>
황 교수의 증언.
『김종필씨가 중앙정보부장이던 그 즈음 강계원씨(전 공화당사무차장·8대의원)와 선이 닿게 됐어요. 당시 나는 서독유학을 마치고 이화여대부교수로 있었지요. 강씨가 조직부장, 내가 조직부차장 격이 되어 전국을 돌았습니다. 공화당이라는 이름은 아직 없었고 우리는 「재건동지회」의 전국지부를 만드는 형식으로 창당작업을 한 겁니다. 「신흥화학」이라는 위장회사도 만들어놓고…박대통령과의 친분도 그때 생겼어요. 그러나 공화당 창당직후 나는 당을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모교인 서울대의 조교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지요. 유학을 결심할 때부터 내 꿈은 모교의 교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물론 공화당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출세할 수도 있었겠지요. 당을 나오니까 다들 배신자니 뭐니 하며 야단이었습니다.
형사들이 우리 집을 둘러싼 적도 있어요. 그냥 뿌리쳤습니다. 나 같은 소장학자를 쿠데타직후의 박대통령은 무척 아꼈던 모양이고, 한때는 정부요직에 기용될 뻔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민비연 사건으로 구속되고 심하게 학대받은 데는 이런 부분에 대한 김형욱의 시샘과 견제가 작용했던 것으로 봅니다. 박대통령도 내가 간첩이라는 정보 부의 보고를 받고 깜짝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정보 부의 발표를 의심했다고 해요.』
황 교수에 대한 박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에 대해서는 당시 중정 수사과장이던 이룡택씨(62·전 국회의원)도 인정하고 있다. 이씨는 그러나『황 박사가 박대통령과 친했었기 때문에 수사과정에서 오히려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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