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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장|밤·낮이 따로 없는「철로 수문장」|명절 때면 귀성객수송"홍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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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철도의 꽃」이자「역장중의 역장」으로 불리는 서울역장.
일제의 잔재여서 바뀌었지만 직모(직모)에 두른 붉은띠와 두줄의 번쩍이는 금테는 한반도 동맥의 중심관문을 지킨다는 공지와 안전운송의 다짐을 담고 있다.
60년대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만 해도 여성잡지에 지명인사로 부부가 한 페이지에 소개되기도 했고, 대통령특별열차가 운행될 때는 각부 장관들을 뒤에 세우고 중앙에서 대통령을 맞이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24시간 깨어있는 역의 생체리듬에 한시도 긴장을 풀수 없고 이용객들의 온갖 항의와 국회의원·고위관리 등 상전 모시기, 특권층의 기차표 청탁, 각종 사고의 책임을 한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고달픈 자리이기도하다. 그래서 직원들 사이에는 서울역장을「따 까리」, 또는「웨이터」라는 자조 섞인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더구나 추석·구정·휴가철·공휴일 등 특별수송기간을 전후해서는 아예 가정과 가족은 뒷전으로 잊고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 한바탕 운송전쟁을 치러야 한다.
80년도 후반에는 민주화의거센 파고 속에 걸핏하면 서울역광장이 가두시위의 중심지가 되면서 서울역장은 필수품으로 마스크를 소지해야하는 또 다른 곤욕을 치렀다.

<철도인 들의 선망>
정통 철도운수 출신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하지만 신참 부 이사관 자리인 서울역장은 승진대상자들에게는 달갑지만은 않다. 서울역장은 대과만 없으면 지방청장-본 청국장으로 승승장구 할 수 있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경력에 큰 흠집만 남기고 도중하차하는, 어쩌면 전과 무를 거는 일종의 도박이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역대 서울역장 중 유일무이하게 교통부차관을 거쳐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초대 이종림씨(작고)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33년 보전을 졸업하고 철도 말단직원으로 투신한 이씨는 여객전무시절 1등 독 실을 검표하던 중 한 일본인승객이 침대에 누운 채 차표를 발가락에 끼워 내미는 수모를 당했다. 이씨는 얼굴색조차 바꾸지 않은 채 보조원에게 나무젓가락을 가져오게 해 젓가락으로 검표한 뒤 자신도 양말을 벗고 발가락에 끼워 다시 돌려주었다.
해방당시 서울역 내근조역(부 역장)이었던 이씨는 미군정의 운수 부 책임자였던 해밀턴 대령에게 영어로 업무현황을 보고한 것이 계기가 돼35세의 나이로 서울역장에 임명됐다. 45년 11월25일(정식임명은 47년 11월1일)의 일이다.
2대 신순우씨(작고)는6·25발발로 대구까지 수송본부가 옮겨가 한동안 역 없는 역장 역할을 해야했고 수복 후에는 철저히 파괴된 서울역 복구에 전력투구했다. 전쟁 중 임명된 3대 박흥복씨(작고)는 53년 10월2일 동란 후 첫 민간열차인 부산 발「12열차」를 서울역에서 맞았다. 영화주제가의 가사로 애창되기도 했지만 이 열차가 떠나는 이틀 밤마다 부산역은 환도승객으로 아귀다툼이 벌어졌고 한껏 뿜어대는 증기와 기적은 피난민들의 애환을 허공에 실어 보냈다.
4대 김인석씨(작고)는 예절을 철두철미하게 따지는 성품이었다 당시 구내 원으로 채용돼 첫 신고를 한 32대 서울역장 김응주씨(현재 철도청 운수국장)는『역장 실에 들어오는 태도가 깍듯하지 못했다고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가 들어와 신고를 하도록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6대 윤기씨는 비운의 역장이었다. 점차 자리를 잡아가던 철도는 59년 9월17일 태풍 사라 호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곳곳의 선로가 파손돼 경부선을 비롯, 간선망이 불통돼 불길한 전조를 알렸다. 60년 1월26일 밤10시45분. 눈 내린 서울역 3번 플랫폼에는 3천8백여 명의 구정 귀향 객들이 앞다퉈 한꺼번에 계단으로 몰리면서 넘어져 31명이 압사하고 38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윤씨는 다음날 직위해제 돼 결국 철도를 떠났다.
철도의 액운은 이어졌다.
65년 12월 말부터 정체를 드러낸 소화물 탁송료횡령사건은 철도사상 최대의 부정사건으로 68명이 무더기로 구속됐다. 먹이사슬로 연결된 횡령과 상납은 서울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당시 역장 이근상씨(11대)와 전임 역장 김준경씨(10대)가 영어의 몸이 됐다.

<전·현직모두 구간>
14대 유경배씨는 66년 11월1일 존슨 미 대통령 방한특별열차를 운행하는 영예를 가졌다. 당초 의전절차에는 서울역장이 특별열차에 동승, 동두천까지 가도록 돼 있었으나 당일 계획이 바뀌어 동승은 못했지만 1주일 여 동안 역장 이하 모든 직원이 역 광장을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맨발로 걸어도 흙이 안 묻을 정도였다. 15대 박동선씨는 서울역장으로 임명 된지 9일만에 서울역에서 철도사의 한 획을 긋는 증기기관차 종운식을 가졌다.
7O년대 고속도로 시대의 개막은 철도운송에 치명타를 안겨줬다. 고속버스가 등장하면서 철도승객이 절반이하로 뚝 떨어졌다. 16대 양주철씨는 친지와 철도관련인사들에게 철도이용을 권하는 사신을 보내고 역장 실에 고충처리 전화를 설치, 승객들을 유인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창구에는 스마일 마크를 붙이는 등 이제까지 철도에서 시도해 보지 않았던 마키팅 기법을 도입했다.
서울대 공대출신인 19대 이악영씨는 선로반 수장으로 일하면서 번쩍거리는 정모와 정장의 서울역장이 선망이었던 부친의 희망을 이뤄 서울역장으로 효도한 입지전적인물로 지금도 철도운수계통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씨는 앉아서 장사하던 철도화물운송에 기업형 제도를 과감히 도입, 일대 개혁을 이루기도 했다.
21대 임봉수씨는 전무후무하게 비 철도인 출신으로 서울역장에 임명됐다. 총무처에서 근무하다 부처교류로 뒤늦게 철도에 입문한 임씨는 그러나 10년 간 본 청에 근무, 업무를 익힌 뒤에야 운수책임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23대 이고우씨는 역구내환경미화에 힘썼다. 이씨는 현재 전철선 플랫폼 부근의 선로 변에 돌을 쌓기 위해 영주에서 돌을 운반해왔고 구내 철도기점에 석 비를 세우기도 했다. 26대 김형배씨는 운수국 재건에 큰 자취를 남겼다. 김씨는 일반행정직에 밀리기만 했던 운수 직의 권위회복을 위해 사무관 승진비율을 5대5로 밀어붙여 관례화 시켰다. 현 홍익회장인 29대 방석기씨와 부평 민자역사 사장인 30대 강성태씨는 각각 국제협력과·감사관 실 등 비 운수계통 출신으로 서울역장을 지냈다.

<최루가스로 곤욕>
최장수 서울역장(3년6개월)을 기록한 31대 고용평씨(서울철도청장)는 재임기간 중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준비, 민자역사 건설과 6·10항쟁이라는 굵직굵직한 사건과 시위사태를 겪었다.6·10항쟁 때는 경찰에 몰린 시위대가 서울역 남쪽 문을 무너뜨리고 구 내로 진입, 철도운행이 중단되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매일 아침 역 광장에 자욱한 최루탄 가루를 청소하느라 용산소방서에 수시로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32대 김응주씨는 담배꽁초역장으로 불렸다. 민자역사가 개관되고 대합실은 넓어졌으나 건물 구조상 환기가 어려워 담배를 피우면 자욱한 연기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 서울역 구내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지정했기 때문. 또 역장이 이른 아침부터 직접 쓰레기를 줍고 다녀 일부직원들은 그를 청소담당 역무원이라고 비꼬기도 했지만 김씨 재임기간 중 서울역이 가장 깨끗했다는 평을 듣고있다.
33대 신진복씨는 재임기간 중 여객과장이 과로로 순직하는 등 직원 2명이 숨지는 액운을 당했고 자신도 과중한 업무로 건강을 해쳐 전직을 희망, 대전지방청장으로 영전했으나 차도가 없어 휴직중이다. 현 이율재 역장은 국토건설 단 출신으로 부하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뽕짝 두세 곡을 불러대는 기분파. 출근하자마자 역구내를 구석구석 돌며 청소상태와 직원들의 근무상태를 챙기는 등 특히「인사 잘하기」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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