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택의펜화기행] 광희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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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수도 한양의 성터와 관련해 무학 대사가 정했다느니, 눈이 녹은 자리를 따라 쌓았다느니 하는 속설이 있습니다만, 사실 태조 4년(1395) 윤 9월에 정도전이 직접 백악.인왕산.목멱산.낙산에 올라 실측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공사는 다음해 1월 9일부터 12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49일 후인 2월 28일 끝납니다. 당시 한양 인구가 5만여 명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인원을 동원한 것이지요. 농한기를 이용한 것입니다.

현재의 광희문.

이때 세운 광희문(光熙門)을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렀습니다. 청계천이 가깝고,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서소문과 광희문뿐이었기 때문입니다. 1886년 콜레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때 광희문 밖에는 내다버린 시체와 죽어가는 환자들로 생지옥을 이루었답니다. 이때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한 소녀를 데려와 치료한 뒤 이화학당에 세 번째로 입학시켜 신여성을 만듭니다. 조선시대 '수구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통한 것은 '아무리 지독한 병마라도 수많은 원귀에 단련된 수구문에는 꼼짝도 못할 것'이라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일 것입니다.

광희문을 남소문이라고도 하는데 남소문은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으나 풍수가들이 경복궁의 손방(巽方, 남동방향)으로 왕가에 황천문이 된다 해서 폐쇄했다 합니다.

광희문은 일제가 서울 성곽을 철거할 때에도 원래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도로를 내느라 1976년 본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옮겨 지었습니다.

김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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