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차 줄 끊어져 추락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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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중랑구 원묵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중랑소방서 주관의 ‘가족안전 체험캠프’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사진 ①) 학부모 세 명이 굴절 사다리차에 달린 구조용 바스켓에 올라타 있다(사진 ②). 이들은 24m 지점까지 올라간 뒤(사진③) 지탱하던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추락했다. 이 학교 6학년생 박모양이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찍어 조인스닷컴에 제공한 사고 직전의 모습을 정지화면으로 캡처했다. ☞동영상은 tv.joins.com

학교에서 소방안전교육을 받던 학부모들이 소방용 굴절 사다리차에서 떨어져 숨졌다.

17일 오전 11시30분쯤 서울 중랑구 묵동 원묵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정모(39.여)씨 등 학부모 세 명이 사다리차 끝에 달린 구조용 바스켓(탑승 공간)을 타고 상공으로 올라갔다가 바스켓이 뒤집어지면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스켓의 무게를 지탱하는 와이어가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사고로 정씨와 황모(35.여)씨 등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오모(38.여)씨는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가 골절되고 골반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 안전 교육이 안전 사고로=원묵초교 4학년생 240여 명과 학부모 10여 명은 이날 오전 9시부터 중랑소방서 주최의 안전교육에 참가했다. 물 소화기 활용 체험, 구급활동 등의 교육이 운동장 곳곳에서 이뤄졌다. 이 가운데 4학년 3반 30여 명과 학부모 3명은 운동장 한쪽에서 '굴절 사다리차 탑승' 훈련 중이었다.

학생 6~7명이 안전요원 한 명과 함께 20여m 위로 올라가 보는 것이었다. 안전모나 매트리스 같은 별도의 안전장치는 없었다.

학생들이 한 번씩 타 본 뒤 이 학급 부회장 어머니인 정씨 등 학부모 3명이 바스켓에 올랐다. 학부모들을 싣고 24m지점까지 올라갔을 때 바스켓이 뒤집혔다. 정씨와 황씨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오씨는 뒤집힌 바스켓에 잠시 매달렸다가 추락했다.

◆ 충격에 빠진 가족.학생=사고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학교 측은 사고 직후 수업을 취소하고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기영(13)군은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는 새 아주머니들이 바닥에 떨어져 피가 튀었다"고 말했다. 사망한 정씨의 딸(10)은 교사를 붙잡고 "우리 엄마 좀 살려 달라"며 울부짖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의 남편(47)은 "아내가 평소 학교 행사에 열심히 참가했다. 이날도 학교의 요청으로 불려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망연자실했다. 서울 원자력병원에 마련된 황씨의 빈소에는 남편 박모(35)씨가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황씨의 시어머니는 "남편 박사 공부시키느라 고생만 하다가 내년엔 자기 집 마련한다고 좋아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학교 학부모 김모(37.여)씨는 "안전장치도 없이 학교 옥상이 다 내려다보일 정도 높이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엄마가 눈앞에서 숨지는 것을 본 아이들 심정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학교보건진흥원의 정신과 전문 상담의사를 통해 이 학교 학생들의 충격을 덜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는 사고 책임을 물어 성환상 중랑소방서장을 직위해제했고, 안전교육 행사를 전면 중지토록 했다. 또 서울 중랑경찰서는 중랑소방서 관계자 등을 상대로 사고 경위 등을 조사 중이다.

한애란.이종찬.한은화 기자

안전장치 없이 안전교육
와이어 한번도 교체 안 해

원묵초 학부모가 참변을 당한 것은 소방용 굴절 사다리차의 바스켓(탑승 공간)을 지탱하는 와이어(가는 쇠줄을 꼬아 굵게 만든 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 와이어는 최대 340㎏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게 소방당국의 설명이다. 성인 3~4명은 거뜬히 태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와이어가 낡아 무게를 견디지 못했거나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사고를 조사 중인 서울 중랑경찰서 관계자는 "사다리차가 1998년 N사에서 만들어 납품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후 회사가 사라져 적절한 정비를 받지 못했으며, 와이어 교체도 이뤄진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소방서는 매일 사다리차의 바스켓과 와이어를 육안으로 검사하고 시험 조작을 해봐야 한다. 하지만 중랑소방서 측은 "아침 일찍 행사가 시작돼 점검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학부모의 시범 탑승에 앞선 학생들의 탑승 때에는 소방관들이 함께 바스켓에 올라탔었다. 경찰 관계자는 "시범에 참가한 일부 학생이 '높이 올라갔을 때 소방관들이 겁을 주려고 일부러 바스켓을 흔들었다'고 말하고 있어 진위 여부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때 와이어가 손상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소방서 측은 "사다리를 펴다 반동이 생기거나 바람에 의해 흔들릴 수는 있지만 바스켓을 흔드는 일은 절대 없다"고 이를 반박했다.

현장엔 매트리스.안전망 등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안전장구가 없었다. 중랑소방서 관계자는 "굴절 사다리차는 움직이는 반경이 넓어 매트리스를 깔 여건이 안 된다"고 말했다. 사고를 부른 행사는 지난해부터 소방방재청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시한 '소방관 아저씨와 함께하는 가족안전' 프로그램의 일부다.

천인성.이현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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