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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토론」펴며 득표호소/박찬종후보 이색 대선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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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금·조직 열세 맨몸으로 극복/양김 등 기득권층 싸잡아 비판/중3부터 정치집념… “포용력 부족하다”지적도
신정치 개혁당의 박찬종대통령 후보는 지난 5월28일부터 거의 날마다 직접 거리에 나서 시민들을 상대로한 「노상정치」를 펼치고 있다. 노상정치는 정치권 일반의 예상보다는 열기가 있는 편이다.
말이 당이지 국회의석 1석 밖에 없는 초미니 정당의 후보로서 그는 정상적인 정당활동보다 시민과 몸으로 만나는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서울의 백화점·터미널·지하철역 앞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싶은 곳을 점심때나 퇴근길에 찾아다닌다.
전두환·노태우·양김·정주영씨 같은 「기득권 세력」을 싸잡아 비판하는 다소 선동적인 기조연설과 시민들 10여명과의 토론이 끝나면 그는 다음과 같은 호소로 노상정치를 마무리 한다. 『나라의 주인인 우리가 좌절하고 깊은 체념에 빠지면 계속해서 엉터리 대통령을 가진 사회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 노 대통령의 실정 5년을 심판하고 야권분열과 5공청산 합의,3당합당 등으로 노 정권을 유지시킨 양김씨를 심판하자.』
박찬종대표는 양김 질서로 고착돼 있는 현 정치구도를 깨는 것에서 자신의 선거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민자당에서 이종찬의원이 김영삼대표를 극복하는데 실패했고,민주당에서 이기택대표가 김대중대표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세대교체론자로서 자신의 독보적 위치를 강조한다.
세대교체론자들의 「후보 단일화」가 자신에게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유권자 사이에 뿌리깊게 내려 있는 반양김씨 정서를 자신에게로 끌어 모은다면 대권접근이 가능하다는게 그의 호언이나 누구도 그 실현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선거운동은 시종일관 역대 독재권력의 부도덕성과,야권후보 단일화 실패로 6공정권에 면죄부를 던져준 양김씨에 대한 독한 공격으로부터 가득차 있다.
박 대표의 「도시게릴라식」선거운동은 그의 독불장군식 정치스타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박 대표는 9,10대 유신국회때 집권공화당의 공천으로 연속당선한뒤 10·26후 당총재였던 김종필씨를 겨냥한 부정부패 추방 등 정풍운동을 일으킨다 제명됐다.
11대때 신군부의 민정당 합류요구를 거부하는 바람에 정치규제에 묶이지 않았음에도 후보등록 방해를 받아 출마하지 못했다.
양김씨와는 민추협·신한민주당에서 짧은 관계를 맺다가 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11월 양김후보 단일화가 실패하자 이를 격렬히 비난하며 「삭발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 대표의 정치적 야망은 야당의 선거운동원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영향받았던 것이라고 한다.
중학3년시절 이미 치밀한(?) 미래의 계획을 세워 27세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의 꿈을 키웠고 청년시절엔 30대 장관→40대 국무총리의 정치계획표를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고시 양과(사법·행정) 합격도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박정희정권이 8대선거때 야당의 지도자급 정치인인 김영삼신민당의원과 대결시키기 위해 공화당 후보를 물색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용병」으로 자원한 것도 그의 정치지향 성향을 잘 드러내준다.
서울지검 검사시절인 32세때 부산 서구에서 김영삼씨와 맞붙어 낙선했던 그가 21년만에 다시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씨와 재대결 하는 셈이다.
그는 8대부터 80년 10대까지 이어진 집권당과의 인연에 대해 『평생 떨칠 수 없는 부끄러운 굴레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81년부터 85년까지의 구속학생 무료변론에 가장 앞장섰고 미문화원 점거농성,부천서 성고문,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등의 선두에 서서 변론을 맡아 「속죄」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달라붙는 「1인 성주」·분열주의자·대권병환자·독불장군·정서불안자 등의 비난은 박 대표의 치명적 약점으로 꼽히는 부분이다. 그는 유신말기 정풍운동이나 87년말의 양김후보 단일화 운동때 많은 동지를 갖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모두 박 대표를 떠났다. 3당합당후 통일민주당 잔류세력 등이 중심이 돼 만든 민주당에서도 박 대표는 부총재로 있었으나 당내 영향력이 거의 전무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치지도자로서 포용력의 문제가 지적되기도 한다. 양김씨를 분열주의자라고 매도한 박 대표 역시 통합야당 합류를 거부한 자가당착을 범했다. 이런 점이 그의 「부끄러운 과거」와 함께 도덕성을 의심받는 요인이다.
박 대표의 가장 큰 무기는 여론이고 가장 큰 취약점은 조직과 자금의 열세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는 양김씨 다음에 위치해 있다. 특히 수도권과 20∼30대 인구집단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조직의 허약함은 91개지구당이 구성돼 있는 신정당 공조직과 「평가교수단」(약 70명으로 구성) 같은 사조직을 활용하면 된다고 밝히고 있으나 결국 그에 대한 개인적 인기로 만회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자금의 열세는 그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를 자신의 청렴한 이미지 부각의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요즘 대통령 선거자금을 위해 「1백만명 1만원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중이다. 돈과 조직으로 안되는 것은 몸으로 때운다는 입장이다.
박 대표는 4명의 대권주자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한글세대라는 점을 자신의 강점으로 제시한다. 경남중·경기고를 거쳐 서울대상대를 다니면서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의 양과 패스 및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딴 화려한 경력을 비교우위로 내세우고 있다.
박 대표가 밝힌 재산상황은 부산 사하구의 대지 70평,건평 40평의 주택과 현재 살고있는 서울 방배동 50평짜리 연립주택으로 부동산만 약 10억원이 된다. 그러나 그의 자금동원력과 실질재산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도 끊임없이 나온다.<전영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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