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3)제88화 형장의 빛(18)|무기수 정기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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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살인죄를 지어 무기수로 14년간 복역하다 모범수로 가출옥하여 새로운 생명을 시작했던 정기환(당시 55세·전남 장흥군 조양리 관호부락)은 츨옥한지 1년만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교도소에 있던 14년을 하루같이 아이들을 키우며 꿋꿋이 기다려온 아내의 뒷바라지는 이렇듯 허망하게 무너졌다. 장흥에서 7남매의 종손으로 태어난 정은 마을 이장·예비군 소대장을 하면서 마을을 위해 봉사했다. 중매로 알게된 이막례 여인과 결혼해 아들 4형제를 얻었다. 서울을 오가며 쌀장사를 해 형편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방앗간을 사서 경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75년 여름은 모질게도 더웠다. 정의 나이 38세되던 해였다. 쌀을 사기 위해 장에 나갔다가 치기배들에게 몽땅 털리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셋째 아들이 친구의 공기총에 맞아 눈을 다치고 말았다. 치료비가 있을리 없었다. 조상 시제에 쓸 돼지 한마리를 끌고 장에 나갔으나 팔리지 않아 아이 치료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친구에게 하소연을 털어놓으면서 술을 몇 잔 했다. 때마침 언젠가 그가 돈을 빌려준 사람을 만났다. 사정얘기를 했으나 채무자는 지금은 돈이 없어 갚을 수 없다고 했다. 티격태격 말다툼 끝에 상대의 폭행을 피하다 뒤에서 말리던 일행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고 말았다.
정기환은 장흥교도소에 구금되었다. 변호사도 살 수 없었던 그는 『술에 취해 있어 잘 모르겠다』는 불리한 진술로 상해치사가 고의살인으로 변경돼 75년 8월 무기형이 확정되었다.
광주교도소에서 형을 살게된 그는 몇 번이나 이 괴로운 세상을 떠나고 싶었으나 먼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회오는 노모의 얼굴을 볼때마다 그런 나약한 생각들을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다. 인간적인 갈등을 극복하고자 불교에 귀의한 그는 무언가 자격증을 따서 장흥교도소로 이감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머니의 불편함을 덜어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목공사 자격시험에 대비한 공부를 시작했다. 피눈물나게 공부한 결과 78년 목공예 2급 시험에 혼자만 합격했다. 그후 가구 2급, 건축도장 2급, 공예 동메달의 자격증을 땄다. 광주교도장 김희탁씨의 주선으로 장흥교도소로 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재소자 총반장으로 1급 모범수가 되었다. 85년 11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6월 정은 장기수에게 이례적인 1주일간의 귀휴를 얻었다. 남자같이 변한 아내의 모습은 그를 가슴아프게 했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자지 않고 일을 한 아내는 큰아들을 부산대 장학생으로 키워 장한 어머니상·효부상을 타기도 했다.
정은 귀휴동안 자그마한 돼지우리 하나를 지어 주었다. 교도소 안에서 모은 돈으로 돼지 두 마리를 사 넣어 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86년부터 장흥교도소로 법회를 다닌 나는 이 착한 무기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정영모 장흥교도소장은 며칠 걸려 가출옥 상신을 써올렸다.
정은 88년 노대통령 취임특사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89년 5월11일 부처님 오신 날 가출옥했다. 출소 후 불어난 돼지를 키우느라 바쁜 틈에 나를 찾아와 『어려운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고 얘기했던 정은 90년 여름 경운기를 몰고 장에 가다 트럭과 충돌,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아내가 14년을 기다리며 장흥땅을 간 것처럼 관호부락의 땅을 갈며 살겠다던 그는 다시 아내와 아이들만 남겨두고 먼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이 기구한 여인의 소식이 일간지에 소개되자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그의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정의 가족들은 지금 부산에서 따뜻한 이웃의 정성에 외롭지 않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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