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새해에는 '정치쇼'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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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년 전 오늘 대통령 선거로 맞붙었던 사람들이 또 싸우고 있다. 그때 쓴 부정한 돈 문제로 서로 잡아먹을 듯한다.

돈. 2003년 대형 사건들의 공통 화두는 역시 돈이었다. 규모도 구실도 수법도 상상을 넘었다. 액수가 수백억원이 안 되고, 정치인들이 끼지 않으면 이제 뉴스가 안 되는 세상이다.

벽두부터 터진 대북송금 사건, 그로 인해 불거진 현대비자금 사건, 굿모닝시티 분양비리 사건, SK비자금 사건,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이번의 불법 대선자금 사건은 지금 해를 넘어가고 있다. 해답은 벌써 나와 있는데 일은 자꾸 커져만 간다. 당사자인 여야 정치 보스들이 치고받는 기세 싸움이 도를 넘으면서다.

"한나라당 불법자금의 10분의 1 넘게 썼으면 정계 은퇴"(12월 14일 노무현), "다 책임지고 감옥 가겠다. 대리인들만 책임져서야…"(15일 이회창), "10분의 1 약속 지킨다"(16일 노무현). 그러자 현직 한나라당 대표도 뛰어들었다. "안 되겠다. 대선자금도 특검 도입!"(17일 최병렬).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저렇게 중요한 사람들이 아무래도 이성을 잃은 듯하다. 그들이 챙겨야 할 국민이 거꾸로 그들의 상태를 걱정해야 하는 기막힌 판국이다.

그렇게들 당당한지 한번 뜯어보고 가자.

대통령 자리가 산수(算數) 한번으로 물러나고 말고 할 자리인가. '10분의 1'을 하야(下野)기준으로 선포한 건 폭투의 극치였다. 뽑아준 사람들은 안중에 없는가 보다. 측근들 비리가 자고나면 튀어나오는데 어디 액수로 따질 일인가. "검찰 수사를 거기에 맞춰 끌고가라는 지침을 던졌다"는 비판에도 할 말이 없다. 또 있다. 초유의 검찰 수사를 '10분의 1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이상한 게임으로 전락시킬 빌미도 줬다. 눈에 선하다. 수사에서 속속 드러날 여야의 불법자금 누적액수를 개표상황 지켜보듯 일희일비할 정치권의 모습이. '누가 어떤 죄를 저질렀다'는 본질은 아마도 뒷전에 갈 것 같다. 한건 한건 나올 때마다 10분의 1을 넘었는지 어떤지를 계산하며 트집잡을 장면들이 기다린다.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정쟁은 불붙게 돼있다.

이회창씨의 자진 감옥행 발언도 코미디다. 세풍사건(국세청을 동원한 한나라당의 1997년 대선자금 모금 사건)이 몇년간 시끄러워도 남의 일인 양 태연했던 그였기에 뜻밖이었다. 의문은 그가 곧장 검찰청사로 기습 출두한 뒤에야 풀렸다.

법을 가장 잘 아는 대법관 출신인 그다. 수사에 풀어가는 순서가 있고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모를 리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막상 검찰에 가서는 범죄요건을 충족시킬 진술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그를 조사한 검찰은 말한다. 최측근이 수백억원의 기업들 돈을 차떼기로 뜯어갔는데도 말이다. 폭탄발언을 하고는 무방비 상태의 검찰에 잠깐 들른 깜짝 이벤트로 그는 엄청 효과를 봤다. 그래서 "쇼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최병렬 대표는 불법 모금을 한 당 사람들의 도피와 잠적을 한달 넘게 방관했다. 가장 많이 먹고도 수사에는 가장 협조를 안 하는 집단의 대장이다. 그러고도 "수사가 잘못되고 있다"고 검찰을 흔든다. 그보다는 먼저 당 사람들을 조사받는 시늉이라도 하게 해야 했다.

해를 마감하는 사건의 속내는 이렇다. 걱정되는 건 이렇게 재미없는 정치쇼를 새해에도 봐줘야 할 것 같다는 거다. 온갖 사건에 치이며 보낸 한해의 끝자락이 심드렁하다.

김석현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