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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cover story] 생일 아내를 울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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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버지 김윤하(65)씨의 일기 - 첫째 날

내일은 아내(강주자.61)의 생일이다. 둘째 딸 동실(31)이가 내일 어딘가를 가야 한다며 오늘 생일잔치를 열자고 해 온 가족이 모였다.

그런데 며느리가 "아버님은 어머님께 무슨 선물 주셨어요?"라고 조용히 물어보는 게 아닌가. 송씨 가문의 귀한 딸 수현이(23)를 며느리로 맞은 지 이제 딱 1년째. 며느리를 보고 나서 아내에게 더 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래도 뭔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지금껏 아내의 생일 선물을 사본 기억은 별로 없다. 우리 세대가 대개 그렇지만 말이다.

며느리가 선물 얘기를 하니 딸들도 덩달아 생일 선물을 챙겨주라며 나를 부추긴다. 아내는 필요없다며 손을 내젓는다. 선물…. 사준다면 뭘 사주나. 머릿속이 깜깜해진다. 선물 얘기는 다 잊어버렸을 때쯤 아내가 며느리에게 말을 건넨다.

"수현아, 네 반지 참 예쁘다."

"커플링이에요. 어머니는 아버지랑 같이 끼는 반지 없으세요?"

아내랑 같이 맞춘 반지라고는 결혼 반지밖에 없었다. 한 돈쭝짜리 금가락지. 그나마 결혼 3년 만엔가 3천원씩 받고 팔아먹었다. 아이들은 커가고 공무원 박봉으로는 생활비를 대기도 빠듯했던 탓이다. 그래도 그때는 팔 반지라도 있는 게 너무 감사했었다.

"아버님, 어머니 생신 선물로 커플링 하나 맞추세요. 저랑 내일 같이 사러 가요."

얼떨결에 며느리에게 그러마 했다.

아들 내외가 집으로 돌아간 뒤 아내가 슬쩍 말한다.

"수현이 임부복도 하나 사주면 좋겠는데."

며느리는 임신 7개월이다. 아내가 내일 미리 백화점에 나가 옷을 사놓겠단다. 반지를 사는 건 며느리랑 나 둘이서 하란다. 며느리 몰래 선물을 줄 심산에서다.

◇ 시아버지의 일기 - 둘째 날

며느리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며느리가 열심히 반지를 고른다.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나보다. 금가락지인 건 분명한데 거칠거칠하면서 반짝반짝하다. 며느리가 손에 맞는지 껴보란다. "여기다 끼면 되는 거냐?" 가운뎃 손가락에 반지를 끼며 말했다. "아버님, 약지에 끼셔야죠." 며느리가 반지를 제대로 끼워준다.

결혼한 게 하도 오래 전 일이라 어느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지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반지를 사고 나서 커피숍에 갔다.

"아버님, 옛날에 연애편지 많이 쓰셨어요?"

"네 어머니랑 11년간 연애하면서 한 50통은 썼던가? 너희 어머니는 내가 열번 쓰면 한번쯤 썼을 게다. 옛날에는 모든 게 느렸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었지…."

며느리랑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품 속에서 준비해 온 흰 봉투를 꺼냈다.

"아직 붓을 잡은 지 1년밖에 안 돼 글씨가 별로다. 그래도 한번 읽어보렴."

'惟公則明 惟廉則威 (유공즉명 유렴즉위)'

며느리에게 주려고 아침에 쓴 글씨다.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면 광명이 오고, 청렴하면 위엄을 떨칠 수 있다는 뜻이란다. 네 남편이 공직에 있으니 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으면 좋겠구나."

"정말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이런 선물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며느리랑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반지를 건넸다.

"30년 전 일이지만 결혼 반지 팔 때 당신 표정이 아직까지 눈에 선해."

"결혼 반지를 다시 찾은 것 같네…. 살다 보니 참 별 일이 다 있네."

평소 털털한 아내이건만 오늘은 눈 아래에 물기가 약간 비친다. 가진 것 없던 나를 만나 아이들 셋을 키우느라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어머님,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가실 때 꼭 같이 끼고 가세요. 자랑도 많이 하시고요."

"그럼, 그래야지."

아내의 반지 자랑이 끝나자 이번엔 며느리가 패션쇼를 한다. 아내가 고른 회색 임부복은 며느리에게 제법 잘 어울렸다.

"평소에도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아버지께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저를 가족이라고 이렇게 챙겨주시는 걸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며느리도 아내도 기뻐하는 눈치다. 이렇게 사랑을 전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나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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