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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 ② ‘함라돔’의 피비린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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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25면

‘사례금’ 덕분에 모시고 올 수 있었던 에즈발 부우사의 청년. 앞의 두건 두른 사람이 필자. 바로 왼쪽의 큰 바위 아래가 코우덱스 문서 발견지. 저 뒤로 보이는 동네가 함라돔. 사진=임진권 기자

한편 13개의 코우덱스(codex)를 어깨에 걸머지고 터덕터덕 귀가의 발길을 옮기고 있는 낙타 등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던 26세의 청년 무함마드 알리는 매우 침울하게 그리고 아주 골똘하게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가 이 파피루스 문서들의 소중한 가치를 그 억만분의 일이라도 알기나 했을까?

‘엘카스르’ 농가의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한 도마복음

물어물어 함라돔으로 가는 길에서. 내가 이렇게 가정집에 사진기를 들이대도 수줍은 듯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지난 4월 21일 사막의 열기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낮, 나는 바로 그 길을 몸소 걸어가면서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무함마드 알리의 소식을 물어보기도 하고, 정확한 문서발견 장소를 알아내기 위하여 이 동네 저 동네를 탐문했다. 안내인은 나보고 매우 위험한 짓이라고 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모습에 관하여 사진 찍는 것을 금지시켰다. 내 카메라의 대상은 사람들의 생생한 삶일진대, 사람 빠진 유적만 찍으라니! 그러나 막상 시골사람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면 물론 질겁하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사진 찍힌다는 사실에 대한 호기심으로 즐거워했다. 더구나 디지털카메라는 금방 찍힌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순박한 것이다. 이집트의 시골은 한없이 풍요로웠다. 구석구석이 생명력이 넘치는 옛 우리 농촌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쓸데없는 금기에 억눌려 있을 뿐이다. 나는 나를 수반했던 사복경찰에게 개인적으로 충분한 사례를 따로 하겠으니 나의 행보를 좀 자유롭게 해달라고 애걸해야만 했다. 이집트는 아직도 ‘개인적인 사례’의 약발이 멕히는 사회였다.

문서가 발견된 사바크(sabakh, 암석 비료) 채집장소는 함라돔(Hamra Dom)이라는 동네에서 가깝다. 그런데 무함마드 알리는 엘카스르(El Qasr) 즉 체노보스키온의 사람이다. 내가 직접 걸어가보니 엘카스르에서 함라돔은 한 10리 정도의 길이었다. 그런데 이 두 마을 사이에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카퓨렛 집안과 몽테그 집안의 패밀리 퓨드(family feud)와도 같은 피맺힌 누대의 반목과 원한이 쌓여 있었다.

풍요로운 이집트 농촌 엘카스르에서(위). 동네마다 이렇게 무장한 민병들이 지키고 있다(아래).

알리는 낙타 등 위에서 지난 5월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지에 대한 사모의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경찰기록에 의하면 1945년 5월 7일 사망). 그 대강의 스토리는 이러하다.

그의 아버지는 엘카스르의 수리조합에서 경비원을 하고 있었다. 범람시기에 넘친 물을 저장하거나, 또 부족하면 나일강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수로는 이집트 농촌의 생명줄이다. 그는 독일에서 수입해온 비싼 관개시설의 밤경비를 하고 있었는데, 관개시설이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것이 아니고 좋은 물펌프 모터 정도의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함라돔 마을에서 그 관개시설을 훔치려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알리의 아버지는 그 침입자를 죽여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 함라돔 사람들이 몰려와서 알리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디밀었다. 24시간 후에 알리 아버지는 자기가 쏘아 죽인 침입자의 시체가 놓였던 바로 그곳에 시체로 누워 있어야 했다. 함라돔의 하우와리스(Hawwaris) 집안 사람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선지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선민의식과 프라이드가 강했다.

무함마드 알리의 엄마는 남편의 시체 앞에서 일곱 아들(아들만 7명 낳았다)을 모아놓고 대성통곡을 하며 긴 낫의 칼날을 세워놓으라고 훈계를 했다. 그들은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뒤로 매일 알리는 숫돌에 낫을 갈면서 맹세를 다짐해왔던 것이다.

자기 등에 둘러멘 코우덱스 문서가 얼마나 고귀한 인류문명의 유산인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열일곱 세기에 걸친 가톨릭교회 도그마 중심의 인류사가 다시 쓰이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신화적 세계를 탈피하여 동서문화의 진면목이 새롭게 소통되는 개벽의 역사가 도래할 수 있다는 일말의 하중도 느끼지 못하는 알리는 낙타 등 위에서 오로지 아버지 복수할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등에 메고 있었던 파피루스 코우덱스를 쇠죽 쑤는 곳간 방 지푸라기 더미 위에 내던져버렸다. 너무도 끔찍한 참변이었다. 사실 1578년간 밀폐된 옹기의 고요한 암흑 속에서 일체의 빛이나 신선한 공기의 흐름에 노출된 적이 없는 유물은, 갑자기 환경변화에 노출되면 변색ㆍ퇴색하거나 바스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물감은 용케 새 환경을 견디었던 모양이다. 진시황릉의 토용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그 찬란한 색깔이 곧 신기루처럼 휘발해버린 것에 비하면 파피루스 위에 쓰여진 광석 혹은 카본 계열의 물감이나 그 접착제의 강력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천 년이 넘는 지하분묘나 유적에서 종이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키 어렵다. 그러나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수천 년을 견딘다. 파피루스가 더 우수해서일까? 천만에! 사막이라는 건조한 풍토의 덕분인 것이다. 삼천리금수강산과도 같은 옥토에서는 모든 공기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습기 때문에 박테리아의 서식을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이런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그날 밤 알리의 엄마가 화덕 오븐에 불을 지피러 나갔다가 헛간에 파피루스가 보이니까 죽죽 찢어서 지푸라기와 함께 불쏘시개로 썼다는 사실에 있다. 열여섯 세기의 이단 박해를 견디어낸 사막의 코우덱스가 일순간에 엘카스르 농갓집 아궁이로 들어가다니! 하긴 겸재 정선의 화첩 등 소중한 우리 문화재도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알리 어미만을 탓하리오마는, 다행스럽게 불 지피는 쏘시개로만 썼기 때문에 많은 파피루스가 타지는 않았다. 하여튼 우리의 도마복음서는 불쏘시개 리스트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드디어 복수의 날이 왔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고 꼭 한 달! 동네친구 한 사람이 알리의 집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알리 아버지를 죽인 함라돔 마을의 한 사람이 먼지 나는 신작로에서 내리쬐는 태양에 지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사탕수수를 고아 만든 조청단지를 끼고 누워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알리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고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의 이름은 아흐마드 이스마일(Ahmad Ismail), 그가 정확한 범인이었는지 어쩐지 누가 알리오마는, 하여튼 일곱 형제들은 엄마의 말대로 서슬 퍼렇게 날을 세워둔 낫과 곡괭이를 하나씩 차고 용전(勇戰)의 길을 떠났다. 피의 복수! 그들에게는 지하드였다.

함라돔의 재수없는 이 양반의 가슴엔 도망칠 새도 없이 잠결에 7형제들의 칼날이 들이닥쳤다. 가슴을 헤치고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일곱 등분하여 일곱 형제들은 당장에서 질겅질겅 씹어 먹었던 것이다. 그들의 얼굴엔 희색이 만면했다. 이들의 관습으로는 마땅한 복수의 충직한 상징적 행동이었다. 하긴 위대한 선지 엘리야도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갈멜산 기손개울에서 한 명도 남김없이 도륙했으니…(왕상 18:40).

나는 엘카스르에서 알리의 족적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금 살아있다면 그는 88세일 것이다. 그의 친척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나의 빈약한 정보로는 실마리가 잡히질 않았다. 나는 엘카스르에서 함라돔으로 가는 도중 에즈발 부우사라는 동네에서 문서발견지를 안다고 하는 사람 두 사람을 만났다.

“함라돔이란 그 동네에서 나는 과일 이름 땜에 붙여진 이름이라오. 그 과일이 껍질이 붉은데 그게 바로 피멍 들어 그렇다고들 하죠. 그렇게 지랄스럽게 싸워요.”

“아직도 함라돔 사람하고 엘카스르 사람이 싸웁니까?”

“요즘은 함라돔 마을 사람들 지들끼리 싸운다우. 함라돔 근처에는 아무도 안 가요.”

그들은 문서발견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같이 가자고 하니까 한사코 같이 가기를 꺼려했다. 엊그저께도 총기사건이 나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사례금’을 두둑하게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나와 동행한 사복 경찰은 허리에 찬 권총의 안전핀을 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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