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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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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04면

황사가 내려앉고 있었다. 성벽 위에 오르면 잠실 아파트 단지가 내려다보이고 아파트 숲 너머 잠실대교가 어른거리고, 그 비좁은 사이로 조선의 왕이 청(淸)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었다는 삼전도(三田渡)가 굽어보이리라는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황사는 어느새 능선까지 내려온 다음이었다. 누런 더께에 눌린 5월의 신록이 안쓰러웠다.

인조 임금이 행궁을 나와 칸이 있는 삼전도로 가던 서문. 서문은 홍예가 낮고 밖이 바로 내리막 가파른 경사여서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김훈(59)씨의 신작 장편소설 『남한산성』(학고재)이 연일 화제다.

출간 2주일 만에 5만 부가 다 나갔고 10만 부 돌파도 목전에 두고 있다. 작가 김훈과 함께 남한산성에 오른 8일, 학고재 손철주 주간은 “오전에만 7200여 부 주문이 쏟아졌다”고 신이 나서 말했다. 근자에 보기 어려운 빠르기다. 요즘 잘 팔린다는 소위 ‘가볍고 재미난’ 읽을거리가 못 되는데도『남한산성』은 잘 팔린다. 옛 성으로 가는 길 위에서 까닭을 물었다. 그는 예의 뜨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김훈과 남한산성을 오르다

김훈씨와 남한산성을 오르려 했던 건 일종의 의례를 치르고 싶어서였다. 1980년대 한국일보 문학담당 김훈 기자는 ‘문학기행’이란 칼럼을 연재했다. 그때 김 기자는 굳이 문학의 성소를 찾아갔고 거기에 당도해서야 문학을 말했다. 그 까다로웠던 의례를, 이제는 소설가가 된 김훈을 내세워 치르고 싶었다. 남한산성은 이내 한국 문학의 새 성소로 등재될 참이다.

서문에 선 작가 김훈은 “나는 삼전도로 가는 임금의 발걸음을 연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문(南門) 앞에 다다랐다. 1636년 12월 14일(음력) 새벽, 북서풍처럼 닥친 청병에 밀려 인조가 이 문으로 성에 들어왔다. 왕은 그 뒤로 47일을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사관(史官)은 날마다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고 적었다. 왕이 남문 앞에 이르렀을 때, 왕의 곁에는 인도하는 자 대여섯과 뒤따르는 자 수십이 전부였다. 말 그대로 한 줌의 무리였다. 그 초라한 행렬을 김훈씨는 소설 들머리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사대는 달아나는 자들을 쏘지 않았고, 달아나는 자들을 잡으러 쫓아갔던 군사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세자가 젖은 버선을 갈아 신는 사이에 견마잡이가 달아났고, 뒤쪽으로 처져서 눈 위에 오줌을 누던 궁녀들은 행렬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문 앞에서 작가는 지체하지 않았다. 대뜸, 서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문으로 난 길은 의외로 가팔랐다. 앞장선 그의 등이 오르막을 따라 구부러졌다. 하지만 두 발은 여전히 부지런했다. 고집스럽고 잰 걸음이었다.

“익숙한 길이지요?”
“집필에 들어간 뒤로는 처음이야.”

저번 겨울 작가 김훈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의 일을,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물렀던 47일의 역사를 소설로 쓰고 있다는 소문만 떠돌았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인조가 산성을 나왔던 것처럼 김 작가는 봄 기운이 차오르는 즈음, 소설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집필에 매달린 건 꼬박 7개월이다. 그러니까 지난해 10월 이후로 처음 들른 것이다. 문득, 김훈 개인에게 남한산성이 처음이었던 순간이 궁금했다.

“한국일보 때려치우고 나서, 한창 방황할 때….”
“그때랑 지금이랑 뭐가 다른가요. 산성 주위로 늘어선 식당하고 모텔 빼고….”
“저기 저거, 성벽….”

그가 가리킨 성벽은 단단하고 번듯했다. 고만고만한 크기와 일정한 모양의 돌들이 안정적으로 쌓여 있었고, 성첩(城堞) 위에 얹힌 검은 기와도 이 나간 데 없이 온전했다. 돌 틈새마다 시멘트 따위가 그득 발라져 있었다.

“옛날엔 여기저기 다 허물어져 있었어. 보기에 흉했지. 지금은…, 그래도 성벽 같잖아?”
“그러네요. 튼실하네요.”

너무 탄탄해 보여 외려 생경하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청나라 25만 대군이 산성을 에워쌌던 370년 전 정월, 성 안 사람들은 성벽 위로 연방 물을 퍼 날랐다. 담장이 무너지고 돌이 빠져나간 자리에 흙을 쌓았고 그 위에 물을 뿌렸다. 흙에 스민 물이 얼어서 얼음 벽은 화살과 총알을 막아낼 만하였다. 그해 겨울, 종묘 사직을 지키려고, 아니 제 목숨 하나 부지해 보려고 조선 병사가 도모했던 최선의 방책은 허술한 담장에 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오로지 소설로 읽혀야 한다

서문은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 해발 450m 지점에 있었다. 각오했던 것보다도 서문은 작고 낮았다. 문 안에 들어가 서 보았다. 2m 남짓한 높이에 150㎝가 안 되는 폭이었다. 370년 전 남문으로 들어온 왕이 이 문으로 나왔다. 청의 장수 용골대는 조선의 왕이 거쳐야 할 성문까지 통고하였다.

조선의 왕은 죄인이므로 정문인 남문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의 장수는 항복의 예를 치르는 조선 왕의 의복에 관해서도 미리 일러두었다.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청병의 푸른 군복을 입었다.

왕은 행궁을 나와 말에 올라탔다. 그러나 서문은 낮다. 왕은 말에서 내려 걸었거나 말 위에 앉은 채로 상체를 바짝 옹크려 문을 지났을 것이다. 문 밖으로는 험한 비탈길이다. 1637년 정월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쌓인 눈이 비탈을 따라 얼어붙었을 터였다. 왕은 말을 타고 내리기를 수시로 되풀이했거나 온 신경을 발가락 끝으로 끌어 모으며 한 발짝씩 걸음을 뗐을 것이다. 항복을 고하러 가는 길은, 청 태종 앞에서 아홉 번 머리를 찧는 투항의 예(禮)보다 어쩌면 더 견디기 버거웠을지 모른다. 서문 안에 들어서고 나서야 남문 앞의 김훈씨가 걸음을 재촉했던 이유를 헤아린다.

남한산성의 서문은 처연하다.

산성 내의 수많은 문루와 옹성과 전각들 중에서 서문은 가장 비통하고 무참하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는 모양이다. (김훈,『자전거 여행ㆍ2』)

김훈 기자가 한국일보를 때려치웠던 건 1989년이다. 이전에도 숱하게 사표를 썼고, 이후 직장에서도 김 기자는 여러 번 사표를 냈다. 한때 그와 같은 언론사에서 밥을 벌었던 이문재 시인은 “김훈은 자주 사표를 냈는데, 그때마다 사표는 어떠한 사안에 대한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의 사표는 ‘칼’일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김훈 기자가 89년에 쓴 사표는 ‘칼’이 되지 못했다. 본래의 소임을 비로소 완수한, 김훈 생의 첫 사표였다. 그 뒤로 그는 자주 자리를 옮겼고 어느 날 불쑥 소설가가 되어버렸다. 비로소 방황을 작심했던 89년의 김훈이 하필이면 남한산성을 찾아들었다는 사실이 영 얄궂다.

그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모멸적이었던, 하여 억지로라도 잊고 살았던 기억을 굳이 끄집어낸 까닭을 잠시나마 헤아려 보았다. 하나 바로 접어버렸다. 그는 진작에 말했고, 또 적었다.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

성벽 아래 종로통은 들고나는 상춘객으로 수선스러웠다. 황사는 저잣거리로 내려오지 않았다. 말 없이 산성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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