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가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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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칠십호가 넘는 마을에서 자라면서 나는 파문한 집을 두 번 본적이 있다.
한번은 남녀 쌍벌 간통죄로 두 집이 동시에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남자는 박씨문중 사람이었고 여자는 우리 송씨 문중 사람이었다. 송씨의 남편은 왜정 때 징용으로 끌려가 해방이 되어도 종무소식이었고 그녀는 과부로 행세, 가마니를 짜 생계를 꾸려갔다. 끝내 박씨 문중 남자와 통정한 것이 들통났고 마을에서는 풍기문란죄로 회의가 벌어졌다.
회의는 두 집이 동시에 마을을 뜨도록 결정했다. 여기에 불복한 것은 박씨였다. 간통한 사실이 없다고 우겨댔다. 그러자 송씨 문중에서 먼저 여자를 데려다 낱낱이 자백 받았고, 이 사실을 박씨 문중에 통보했다. 박씨는 역시 자기 문중회의에 나가서도 완강히 자백을 거부했다.
다음날 송씨 문중 청년들이 박씨 집을 덮쳐 세간을 박살냈다. 솥 단지가 마당에서 굴렀고 장독대가 와지끈거렸다. 또 한번은 양씨 집 청년이 문둥병에 걸렸다. 문밖출입을 금하고 마을을 떠날 것을 통고했지만 뒤 창고에 몰래 숨어살다 다시 꼬리가 밟혔다. 양씨 집은 마을샘물을 먹어선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래도 듣지 않자 청년들은 양씨 집 사립을 파버렸다. 소위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파문이란 것이었다.
이런 마을에 불효자나 깡패가 날리 없고 마을정치가 똑바로 맥을 이어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위계질서가 바른 마을이었다. 어지간한 마을일은 모두 원로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흉년이 오면 부잣집에서는 곳간을 열어제쳤다. 마을이장도 이 원로회의에서 결정됐고 송씨 문중과 박씨 문중이 번갈아 가면서 의좋게 했다. 불상사가 있어 법에 호소할 일이 있어도 양대 문중 원로회에서 모양새를 갖추었다.
자유당시대 지서주임도 부임해오면 이 원로회에 맨 먼저 인사를 오곤 했다. 좌우익 대결의 그 인공시대에도 사람하나 다치지 않았다. 비유컨대 마을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면한 총체적 위기의식도 이 반촌의 정신이 무너진 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지하철을 함께 타고 갈 원로들이 없는 것이다. 그 원로들이란 이 땅에선 이미 파문당한 인물들뿐이다.
그 원로들이 오늘토록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설날에 이 지역에서만이라도 세배 갈 수 있는 원로 한 분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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